“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장소 선정 의의, ‘강제성’ 계속 요구해야…향후 등재 후보지 강제동원 연구 필요”
―사도광산 등 조선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강제징용됐나.
“당시 조선인은 노무자 신분이었다. 노무자는 노동자와 달리 일왕에 대한 의무만 있는 존재였다. 조선인들은 세 가지 경로로 강제동원 됐다. 모집, (관청의) 알선, (국민) 징용이다. 이는 수송의 책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나눠진다. 징용은 책임자가 정부다. 군대에서 하듯 밥을 주고 콩알만큼이라도 월급을 준다. 다치면 보살펴 줘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정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기업에 일임했다. 이게 모집이다. 기업은 노무자를 수송할 때 기차 삯, 도시락 값, 입는 옷, 탄 캐는 곡괭이, 랜턴 등을 노무자 개인 빚으로 달아 놨다. 주민세도 내게 했다. 조선총독부에 줄 돈으로 주당 100엔씩 각출했다. 당시 총독부는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됐다. 전쟁이 발발하고 돈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는 일정 부분을 자체 충당하라고 했다. 그래서 총독부가 100엔씩 가져가게 된 것이다. 일종의 인신매매였다. 기업은 수송비와 총독부에 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가혹하게 행동했다.”
―일본 우익은 징용이 1944년 9월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틀린 주장이다. 징용은 1939년 7월 일본인에게 적용됐고, 1939년 10월부터 조선인에게 적용됐다. 처음에는 기술직 같은 필수 인력만 갔다. 징용은 잘 안 됐다. 일본인들도 도망가고 저항했다. 조선인은 그런 인력이 없어 징용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1941년부터 징용됐다. 군 공사장 등으로 갔다. 그런데 기업이 가혹하게 하다 사람이 죽었다. 부조금을 줘야 하는데, 처음에는 좀 주다가 나중에는 안 줬다. ‘저기 가면 다 죽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열심히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동원이 안 되니 실효성이 떨어졌다. ‘정부가 책임을 안 지면 동원이 안 된다’고 해서 정부가 주도하는 징용을 확대한 게 일본 우익이 말하는 1944년 9월이다. 우익들 입장에서는 강제동원 기간이 짧아야 유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미쓰비시는 어떻게 사도광산을 소유하게 됐나.
“징용이 시작됐을 때 징용장 나왔다고 난리 친 것은 일본 민중들이다. 다 도망가고 저항하고 하니까 일본 정부가 ‘현원 징용’을 실시했다. 작업장 전체를 징용한 것이다. 회사는 이득이다. 정부 돈이 나온다. 그다음 생산품을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고, 철강 같은 원료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제공한다. 기업 이익이 극대화됐다. 이때 사도광산을 받은 게 미쓰비시다. 미쓰비시는 처음부터 대기업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재산이 늘었다. 이 시기 우리 사업장을 지정해 달라는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원 징용을 해도 직원들은 반발했다. 노동자에서 징용자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 군대처럼 징용되면 제대로 된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 임금 통제령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사장 징용’을 했다. 너도나도 똑같은 징용자라는 심리적인 것을 노린 것이다. 그 정도로 일본 민중들이 협조하지 않았다.”
―강제징용된 사도광산 조선인 노무자들의 생활상은 어땠나.
“그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사도광산을 보면 갱 내부에 노무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대목이 전시돼 있다. 사도광산 측은 6개월에 한 번씩 광산 통제하는 관에 관리 보고서를 올리게 돼 있다. 10명이 죽으면 ‘10명 소모’라고 표현했다. 군수품 취급을 한 것이다. 사고로 죽으면 개인 사정으로 죽은 것으로 보고했다. 린치로 죽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폭동이 많이 일어났다. 사도광산은 섬이라 도망갈 곳이 없는데도 폭동이 일어났다. 그만큼 열악했다는 것이다. 폭동이 일어나면 군대가 와서 진압했다.”
“당시 갱내에는 99% 정도가 조선인 노무자였다. 갱내에서 석탄을 캐면 분진이 폐에 쌓인다. 그러면 진폐증(폐에 분진이 쌓여 굳어지는 병)에 걸린다. 사도광산 돌은 석영암이다. 돌 자체가 딱딱한 광산이다. 이 각진 돌이 몸속으로 들어가면 장기에 박혀서 통증을 유발한다. 당시 일본 니가타 의대에서는 아예 사도 광산 광부들을 대상으로 박사 논문을 냈다. 의대에서 조사해 보니 갱내에 있는 노무자 대부분이 폐에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2~3년밖에 못 살 정도로 가혹한 곳이었다.”
“제가 유족들을 찾아와서 보니 1970년대에 많은 분이 돌아가셨다. 한 유족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다른 고충도 있었다. 여기 광부들은 굴을 뚫는 기술자들이다. 일본은 400명 정도를 다른 군 공사장으로 보냈다. 해방 후에는 이들을 귀국시키지 않고 다시 광산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다. 광복 세 달 후인 11월부터 조금씩 돌려보냈다. 광부들을 소유물로 생각한 것이다. 화가 나는 지점이다.”
―사도광산 강제징용 피해자 명단은 어떻게 찾아냈나.
“1946년 일본 후생성이 각 기업에 노무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강제성이 없는 명령이라 미쓰비시는 4개 정도 제출했다. 미쓰비시가 조선과 일본에서 운영했던 작업장이 200개가 넘는다. 사도광산 명단은 제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광산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 명부가 없는 지점에서 출발했다.”
“당시 노무자들에게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무조건 담배를 줬다. 환각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이들은 담배를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마을에 가서 다른 물건하고 먹을 것을 교환했다. 이 담배를 배급한 배급소가 있었다. 나중에 배급소 건물이 너무 오래돼서 주인이 건물을 정리하기로 했다. 지역 주민들이 여기에 중요한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고 다 쫓아갔다. 주민 중에는 박물관 관장을 했던 분도 있다. 연초명부가 있었다. 명단에는 충남 논산 출신이 많았다. 주민들이 논산까지 와서 생존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제가 2019년에 (이들이 확보한 자료) 일부를 찾아내서 보고서에 소개했다. 조선총독부 연령자 및 명부라는 명부도 있었다.”
“명부에 나온 이름과 강제동원 피해자 데이터베이스 이름을 대조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일본 국빈 방문 때 일본 정부에 요구한 명부다. 일본은 2년에 걸쳐 48만 명 정도의 이름을 찾아서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 때 전산화 작업을 했다. 신문기사에 나온 이름도 찾아서 엑셀에 입력했다. 747명 나왔다. 한국 정부나 외교부는 그런 명부를 모른다. 제가 찾아낸 거니까.”
―정부 대응을 평가한다면.
“이번에 빵점 맞을 줄 알았는데, 30점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디테일을 확보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로 평가하는 것은 의미 없다. 2015년 군함도 때는 강제동원이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얻었다. 사도섬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다. 향토박물관 자리는 에도 막부 관공서였고, 나중에는 미쓰비시 사도섬 사무소였다. 상징성 있는 곳이다. 일단 장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계속 ‘이 내용 넣어라, 이것 만들어라’라고 할 수 있다. 강제성이 빠진 부분은 아쉽다. 그러나 그 강제성은 2015년 군함도 때 확보했다. 세계 국제기구에서 공식적으로 규정한 강제성이다. 일본이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계속 리마인드 시켜줘야 한다.”
―일본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나.
“우리는 문화재를 국가유산청이 담당한다. 일본도 국가유산청이 일정 부분 담당한다.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관방장관이 직접 한다. 문화가 아니다. 정치다. 일본은 세계유산에 올릴 잠정 목록을 뽑았다. 군함도를 앞 순번으로 뽑은 게 아베였다. 국무회의에서 순번을 정하는 것이다. 카토 코코라는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 센터장이 있다. 아베의 절친이다. 세계 산업유산 등재 때 논리를 만드는 것을 카토가 하고 있다. 카토는 정보센터에 ‘군함도의 조선인과 일본인은 잘 지냈다’는 내용으로 전시하고 있다. 문제를 희석하는 거다. 카토의 전략이다.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 책도 전시했다. 전시관에 들어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인이 가면 해설사가 동선을 정해준다. 이영훈의 책을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나중에 이코모스(ICOMOS·유네스코 자문기구)에서 개선하라고 했다. 이영훈 책 하나 빼고 우리는 조치했다고 했다.”
―일본이 이처럼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카토의 말에 답이 있다. 카토는 ‘아름다운 일본’을 말했다. 과거의 어두운 면을 긍정적인 면으로 덮어가는 것이 목적이라는 거다. 군함도에 갔을 때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양복 입은 회사원들이 있었다. 출장 온 사람들이었다. 표정이 결연했다. 이곳에 왔는데 그냥 간다는 것은 조상들에게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는 거다.”
―앞으로 한·일 협상이 필요한 근대 산업유산이 다수 있다.
“세계유산 후보로 올릴 산업유산 300선 중 조선인 강제동원 관련된 장소가 약 40%다. 구로베가와가 다음번에 올라갈 곳이다. 자연친화적인 곳이다. 이곳에 댐을 오랫동안 만들었다. 조선인도 동원됐다. 관련된 책이 딱 한 권 있다. 일본 르포작가들의 책이다. 그러나 전범기업의 책임성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일본과 한국에 연구자가 한 명도 없다. 유네스코는 논문 같은 학술적 근거를 중요하게 본다. 그다음이 아시오 동광산이다. 약 300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가 없으면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사도광산 이후로는) 연구자가 없다. 대응 못 한다. 박수 치고 끝나는 거다.”
―무엇이 가장 시급한가.
“일본 정부 세계유산 후보군 목록에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고, 관련 연구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번에 30점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과 자료의 힘이다. 일본은 부정의 실증주의를 주장한다. 근거가 없으면 없는 일이라는 거다. 우리의 자료를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 그 자료 중 하나가 명부다. 가장 강력하다. 명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거기서 추출해서 피해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