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입법 독주 강행→윤 대통령 거부권 반복…민주당 특검 드라이브, 국민의힘 필리버스터 맞불
22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 처리한 민생 법안은 0건이다. ‘식물국회’로 불리는 이유다. 8월 1일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22대 국회가 임기를 시작하고 지난 60일 동안 국회가 실질적으로 통과시킨 법률은 0건이다. 고래 싸움에 국민만 죽어가고 있다. 제발 일 좀 하자”라며 “국회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뻔한 사안만 골라 야당 단독으로 통과시키고,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거부권을 행사하는 무한 루프 ‘강 대 강 대치’가 반복되고 있다. 나라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입법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8월 9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약 2600개에 달한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7건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거대 야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 3조 개정안) △채 해병 특검법 △방송 4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방송통신위원회법)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등이다.
민주당이 여야 이견이 없는 법안마저도 뒷전으로 미루고 이재명 공약과 특검에만 힘을 싣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양육 의무를 다하지 못한 친부모가 자녀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구하라법’(민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모성보호 3법(근로기준법·남녀고용법·고용보험법 개정안)은 올해 예산까지 반영된 만큼 국회 통과가 시급하다.
민주당 한 의원은 “이렇게 밀어붙이면 우리 지지자만 환호하지 않겠나”라며 “입법 독주해도 결국 대통령 거부권에 막힌다. 피로감만 상당해졌다. 여야가 협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 운영 책임이 있는 여당을 향한 시선도 곱지 않다. 법안마다 ‘상정→여당 필리버스터→강제 종결→야당 단독 처리’가 반복됐다. 국민의힘은 야당이 협의 없이 발의한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로 대응했지만, 당 안팎에선 여론의 주목을 끌기는커녕 피로감만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민의힘 의총에서도 필리버스터 전략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됐다(관련기사 실리도 명분도 예전 같지 않네…국회 ‘필리버스터 회의론’ 까닭).
국민의힘 한 의원은 “국정운영 책임이 있는 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해 민생 챙기기에 먼저 나서야 한다”며 “여야 극한 대치에 의원들도 지쳐있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여당이 야당보다 먼저 ‘민생 드라이브’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8월 8일 한동훈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에너지 취약계층 130만 가구를 대상으로 전기요금 월 1만 5000원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취약계층의 월 전기요금 부담을 ‘0원’에 가깝게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전날 7일 한 대표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법안을 당론으로 추진하고 대통령 직속 반도체 특별위원회를 설치할 뜻도 밝혔다. 특검·탄핵에 집중하는 야당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행보로 풀이된다.
앞서 8월 5일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정쟁 법안들은 당분간 미뤄두고 여야 간 이견이 없거나 크지 않은 민생 법안은 8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자”고 거듭 제안했다.
8월 8일 여야는 8월 임시국회에서 ‘구하라법’, 간호법 제정안 등 비쟁점 민생법안을 처리하기로 뜻을 모았다. 간호법 제정안은 진료지원(PA) 간호사 법제화를 담은 내용이다. 하지만 민생 법안과 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여야정 협의체 구성은 무산됐다. 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전환과 영수회담 제안 수용을 조건으로 내걸면서다.
박성준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달라”며 “대통령이 영수회담도 하고 여야 원내대표를 불러 법안, 예산 관련 요청도 하는 가운데 정치가 살아나는 것이다. 여야정 협의체를 한다고 해도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법안을) 걷어차면 무슨 의미겠나”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방송 4법은 국무회의에서 재의요구안을 의결해 윤 대통령의 재가만 남은 상황이다.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과 노란봉투법은 국회로부터 정부로 이송돼 오는 8월 13일 국무회의에 재의요구안이 상정될 예정이다. 이를 모두 거부하면 윤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는 21번에 달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여야 대표가 만나서 먼저 논의하는 게 있어야 영수회담도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지금은 국회 정상화가 먼저”라며 “야당이 탄핵과 특검, 위헌·위법적 법률을 강행 처리하고 있다. 영수회담 제의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8월도 ‘식물 국회’를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8월 8일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두 차례 폐기된 ‘채 해병 특검법’을 재발의했다. 특검 수사 대상에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 등이 김건희 여사 등에게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구명을 부탁한 불법 로비 의혹’을 추가했다. ‘야당 단독 법안 처리→대통령 거부권→재표결·법안 폐기’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동훈 특검법(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의 검사·장관 재직 시 비위 의혹 등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과 ‘김건희 특검법(대통령 윤석열의 배우자 김건희의 주가조작 의혹 등 진상규명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관련해 향후 청문회 또는 공청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민주당이 특검·탄핵에만 몰두하면서 민생 실종 책임론에 휩싸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8월 9일 곽규택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이 여야정 협의체 전 영수회담을 조건으로 내건 데 대해 “민생 회복 의지와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며 “영수회담을 제안한 이튿날 대통령의 배우자를 수사 대상에 올린, 법안을 발의한 것만 보더라도 여전히 ‘정쟁’과 ‘공세’라는 정략을 놓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민생이다. 무한 정쟁 속 발목잡기식 ‘빈손 국회’는 국민의 뜻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민주당이 영수회담을 요구한 건 당리당략적인 측면이 있다. 탄핵·특검 폭주를 멈추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민생보다는 정략적 목적이 더 우선이라는 것이다. 피로감이 상당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국민이 민생에 관심 없는 민주당을 해산하라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정당이 국민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국정운영 마비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