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빌라 ‘무주택 간주’에도 서울에선 거래 실종…“전세 사기로 매매·전세 외면 분위기 이어질 듯”
이들 중개사무소들이 하루에 몇 건 받는 문의 전화는 대부분 월세나 간혹 전셋집을 찾는 경우로 빌라를 구입하려는 ‘매매’ 문의는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중개사무소장은 “8월 들어 빌라 매매 계약은 1건도 없었고 상가 점포만 1건, 7월은 아파트 전세 계약만 몇 건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중개사무소장은 “8월은 물론 지난 6~7월에도 실거주 목적의 빌라 매매 계약 건은 전혀 없었다”고 상황을 전했다.
전세사기 사태 여파로 2년 이상 침체기를 이어온 빌라 거래 시장이 최근 정부가 내민 거래 활성화 유도책에도 꿈쩍 않는 분위기다. 최근 서울 아파트값 급등에 긴장한 정부가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빌라로 매수 수요를 돌리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 현장에서 전혀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8일 발표한 이른바 ‘8‧8 부동산대책(국민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확대방안)’에서 아파트 청약 시 ‘무주택 보유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빌라 공시가격 범위를 수도권 기준 ‘1억 6000만 원 이하’에서 ‘5억 원 이하’로, 면적 범위도 기존 ‘60㎡ 이하’에서 ‘85㎡ 이하’로 대폭 넓혔다. 3억~4억 원대는 현재 서울에서도 제법 많은 지역에서 4인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방 3개 이상 빌라를 매수할 수 있는 가격대다. 정부가 이 가격대 빌라를 구입할 경우 미래 아파트 청약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시장 반응이 거의 없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일요신문i’가 ‘8‧8 대책’ 발표 이후인 지난 9~13일 국토교통부에 신고된 서울시내 빌라(다세대‧연립) 매매 계약 건을 모두 조사한 결과 서울 25개 자치구에서 총 60건(14일 오후 2시 기준)이 신고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강남‧동대문‧서초‧영등포‧중구 등 5개 구는 ‘0건’을 기록했다. 관악구에서 가장 많은 8건, 강서‧노원구에서 각각 6건, 강동‧광진‧용산‧은평구에서 각각 1건이 신고됐다.
올 상반기 아파트와 달리 정체됐던 빌라 거래 분위기는 하반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1~6월 서울시내 다세대‧연립주택 매매 거래는 총 1만 4281건, 1일 평균 78.5건으로 아파트 매매 거래 건(총 2만 4775건, 1일 평균 136.1건)의 57.6%에 그쳤다.
김옥순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양천구지회장은 “요즘 중개사무소가 바쁠 일도 없으니 거래가 나오면 바로바로 정부에 신고하는 분위기인데 8월 8일 이후 신고 건 자체가 많지 않다면 실제 거래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김 지회장은 “예년 같으면 빌라 매매 거래를 한 달에 1~2건, 많을 때는 2~3건 중개했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며 “주변 중개사무소들도 대부분 1년에 간신히 1~2건 거래하는 수준이어서 영업을 아예 중단하거나 폐업한 곳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전세 사기 대표 지역인 강서구 화곡동, 양천구 신월동 등지에서 활동 중인 한 중개사무소장은 “정부가 내놓은 ‘5억 이하 무주택 간주’ 정책은 적어도 우리 지역에는 적용이 안 될 정책”이라며 “전세 사기로 저조해진 빌라 매매‧전세 외면 분위기가 앞으로 1년은 더 이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성북구 장위동에서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이정옥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성북구지회장은 “전월세 문의 손님만 조금 있고, 실거주 목적 빌라 매매 문의는 거의 없다”며 “1~2개월 전과 비교해 시장 분위기에 큰 차이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제한적 수준이지만 올가을쯤부터 정책 효과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시선도 있다. 은평구 신사동 빌라촌에서 중개사무소를 운영 중인 강정희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은평구지회장은 “국민들이 이번 정부 대책의 내용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정책효과가 나타나기에는 다소 이른 시기”라면서 “아파트 청약 준비 때문에 빌라는 사지 않으려던 요인에는 영향이 좀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강 지회장은 “이르면 9~10월부터 4분기에는 빌라 거래가 10% 정도 늘지 않을까 예상한다”며 “주로 2015년 이후 지어진 준공 10년 차 이내, 3억~4억 원대를 중심으로 빌라 거래가 있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정부 정책 취지에 대해 다소 엇갈린 평가를 내놓으면서 추가 대책의 초점에도 차이를 보인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소장은 “아파트와 빌라는 전혀 다른 것인데도 아파트 청약 때 빌라 보유자가 규제 대상이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점에서 이번 대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다만 빌라 구입에 발목 잡던 수많은 요인 중 한 가지를 제거한다고 평소 빌라에 관심 없던 국민들이 갑자기 빌라 매수에 나서기는 어렵고, 취득세나 세제 관련 추가 규제 완화가 있어야 매수 수요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빌라 전세에 대한 기피로 전세가가 떨어지면서 매매 거래도 감소한 것인데 보유 주택 수에서 제외시켜준다고 누가 갑자기 매수에 나설지 의문”이라며 “정부가 정책 포인트를 잘못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빌라 매수 수요는 재개발 추진 노후 빌라를 사거나 신축 빌라를 매수한 뒤 높은 보증금으로 전세 임차인을 들이려는 목적, 크게 둘로 나뉘는데 전셋값 하락으로 투자성 신축 매수 수요까지 사라진 것”이라며 “정부가 전세사기 방지대책을 잘 가동해 전셋값이 회복되면 자연스레 신축 매매부터 살아나고, 그 이후 규제 완화 정책들이 조금씩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빌라 전세 사기에 대한 사회적 불안감 해소를 위해 임차인이 임대인 동의 없이 ‘안심전세앱’에서 임대인의 주택보유 건수를 확인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일정 요건을 갖춘 ‘안심 임대인’ 주택에 대해서는 네이버부동산, 직방 등 민간 부동산플랫폼에서 ‘인증 마크’를 붙여주는 등 정책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이강훈 기자 yg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