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백’ 외압에 괴로움 호소했다는 증언 나와…‘김건희 살인자’ 발언 파문 커지며 진상규명 뒷전
#정치권 굵직한 사건 조사 지휘
8월 8일 세종시 중촌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김 국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김 국장이 출근하지 않은 채 연락도 받지 않자 한 부하 직원이 아파트를 찾았고, 안방에 숨져 있는 김 국장을 발견했다. 김 국장은 서울에 가족을 두고 세종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국장은 1999년 제43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권익위 보도자료 등을 종합하면 김 국장은 2008년 청렴정책총괄과에서 공공기관 무료 청렴 컨설팅 등을 담당했다. 2014년 청렴조사평가과 과장으로 있었고, 2018년엔 청렴총괄과장으로 있었다. 2023년 2월엔 청렴연수원장으로 발령됐다가 4개월 뒤인 6월 운영지원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3급 부이사관인 김 국장은 2급 이사관 승진을 앞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20년 넘게 부패방지 업무를 담당한 전문가인 셈이다.
김 국장은 권익위 청렴·부패·채용 비리 관련 조사 실무를 맡고 있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사건,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민원 사주 의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응급헬기 이송 사건 등 정치권의 굵직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지휘했다.
권익위는 김 여사 명품백 수수사건에 대해 “대통령 배우자는 청탁금지법상 제재 규정이 없다”며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했다. 정승윤 권익위 부위원장은 7월 9일 “청탁금지법상 제재 규정이 없는 공직자 배우자에 대해서는 헌법의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제재할 수 없으므로, 처벌을 전제로 한 수사 필요성이 없어 종결했다”며 “240만 공직자 배우자를 법의 근거도 없이 처벌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류희림 방통심의위 위원장 민원사주 의혹에 대해서는 7월 8일 ‘판단 불가’ 결정을 내렸다. 이 의혹은 류 위원장 가족과 지인 등이 2023년 9월 4~18일까지 ‘김만배·신학림’ 녹취록에 대한 민원을 방통심의위에 제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거졌다. 관련 민원 270여 건 중 최고 127건이 류 위원장의 사적 관계자들이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익위는 류 위원장의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방통심의위로 송부한다고 했다. 증언이 서로 엇갈려 권익위가 사실관계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방통심의위가 스스로 처리하라는 취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응급 의료 헬기 이송 특혜 논란 신고 사건도 종결 처리했다. 지난 1월 이 대표는 괴한에게 피습을 당한 직후 부산대병원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응급 의료 헬기를 이용해 이송됐다. 다만 권익위는 헬기 이용 과정에서 부산대병원과 서울대병원 의사, 부산소방재난본부 직원들의 행동강령 위반 사실을 확인했고 이를 감독기관 등에 통보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암살시도로 생사를 오가는 야당 대표를 구하기 위해 애쓴 부산대병원과 서울대병원 의사, 부산소방재난본부 직원들이 대체 무슨 행동강령을 위반했다는 말이냐”며 “대통령 부인의 디올백 수수에 대통령과 직무관련성이 없고 신고 의무도 없다며 무죄를 준 권익위가 야당 대표에 대한 응급치료는 유죄라고 말하는 것이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자신의 업무를 했을 뿐인 김 국장으로선 정쟁 한 가운데 서 있었던 셈이다.
김 국장은 주변에 이러한 상황 때문에 심적으로 부담감이 크다고 토로했다는 전언이 나왔다. 한겨레는 8월 8일 김 국장이 이지문 (사)한국청렴본부 이사장에게 문자메시지로 ‘최근 저희(권익위)가 실망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하다. 심리적으로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이 이사장은 지난 6월 27일 김 국장이 전화로 ‘권익위 수뇌부에서 김 여사 명품 가방 사건을 종결하도록 밀어붙였고, 자신의 생각은 달랐지만 반대할 수 없었다’는 취지의 말을 전하며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이 이사장은 8월 10일 페이스북에 “극단적 선택 속보가 나온 후 얼마 안 돼서 기사 내용이 업무과중, 스트레스로 인한, 마치 개인의 힘듦인 양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가 업무가 고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알려지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 6월 말 통화 그리고 세상을 뜨기 이틀 전 나눴던 (카카오톡) 내용을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죗값을 치러야 할 것" vs "무엇을 잘못했나"
야권은 김 국장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겠다고 밝혔다. 8월 8일 노종면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고인은 권익위 국장으로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을 담당했고, 이 전 대표 응급헬기 이송 사건도 맡았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권익위 내부 실무자들이 말하지 못할 고초를 당한 것은 아닐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노 원내대변인은 “민주당은 고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고인의 유가족과 동료들이 2차 가해를 당하지 않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권익위를 담당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사회민주당 의원 일부는 8월 9일 김 국장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권익위원장 시절 김 국장과 함께 일했던 전현희 의원은 다음 날인 10일 빈소를 찾았다. 전 의원은 주변에 있던 윤석열 정부 인사들에게 “반드시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외쳤다고 전했다. 그러자 김 국장 직속상관인 정승윤 부위원장이 뒤따라 나와 “도대체 우리 권익위가 무엇을 잘못했나”라며 반발했다.
이에 전 의원은 “윤석열·김건희 대통령 부부 비호를 위해 권익위를 망가뜨리고 청탁금지법을 무력화시킨 바로 당신들이 잘못이고 문제”라고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 정 부위원장은 김 국장에게 압력을 넣은 인물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은 김 국장 죽음을 정쟁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했다. 8월 13일 국민의힘 정무위 소속 의원들은 “민주당이 무리하게 강행하는 탄핵과 청문회로 얼마나 많은 공무원들이 고통받고 있나”라며 “정무위 업무보고에서도 하루 종일 현안 보고는 뒷전인 채 김건희 여사 가방 사건과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의 헬기 이송 관련 질문을 무한 반복하며 취조하듯 밤늦게까지 권익위 공무원들을 몰아세운 것이 민주당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여야 갈등은 8월 14일 폭발했다. 이날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헌정사상 첫 검사 탄핵소추 조사 청문회가 열렸다. 전현희 의원이 법사위 소관이 아닌 김 국장 사망 사건을 언급하며 “국회 정무위원장이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이라 청문회를 거부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전 의원은) 그분의 죽음에 죄가 없느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전 의원이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자는 것”이라며 “김건희가 살인자”라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여야 의원들의 고성에 청문회는 잠시 중단됐다.
이날 대통령실은 전 의원의 ‘김건희가 살인자’라는 발언에 대해 “한 인간에 대한 인권 유린이고 국민을 향한 모독”이라며 “공직자의 안타까운 죽음마저 또다시 정치 공세에 활용하는 야당의 저열한 행태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국민의힘도 같은 날 전 의원에 대한 제명 촉구 결의안을 냈다. 국민의힘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할 의무를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밝혔다.
다만,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번질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유승민 전 의원처럼 진상규명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야권 일각에서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출마한 전 의원이 당원 표심을 얻기 위해 이 같은 강성 발언을 쏟아냈다고 주장한다. 실제 ‘김건희가 살인자’라는 발언이 나온 다음 지지율이 급상승한 것으로 전해진다. 8월 18일 전당대회에서 전 의원은 15.88%의 득표율을 올리며 최종 득표수 2위에 올랐다.
전 의원 발언에 대한 후폭풍이 거세지자 박찬대 원내대표는 8월 16일 “바른 정치 언어를 구사하고 국민 수준에 맞는 얘기를 나누는 건 국회의원에 요구되는 의무”라며 “(전 의원 발언이) 국민들이 보시기에 거슬리고 불쾌하셨다면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대리 사과’를 했다.
그러나 여권은 전 의원에 대한 압박을 이어나갔다. 국민의힘 소속 이종배 서울시의원은 8월 16일 전 의원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4일 뒤인 20일에는 전 의원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민주당은 ‘김건희 특검법’에 김 국장 사망 사건을 추가하기로 했다. 송석준 의원 제명 촉구 결의안도 제출했다. 정무위 야당 의원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추진도 속도를 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무위는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어 청문회 개최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민주당은 청문회 개최가 어려우면 다른 상임위를 이용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강유정 원내대변인은 8월 11일 기자들에게 “정무위는 상임위 개최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라 운영위원회 현안 질의를 통한 청문회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은 8월 22일 정승윤 부위원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다. 민주당은 “정승윤 부위원장은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종결 처리했으며, 그 과정에서 조사 관계자와 전원위를 상대로 종결을 종용하고 강요한 혐의가 짙다”고 주장했다.
권익위는 김 국장에 대한 외압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8월 19일 유철환 권익위원장은 “고인께서 전원위원회 표결 의결권이 있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서 누구든 그 분께 어떤 결론에 대한 압박, 외압을 가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며 “신고 사건 처리와 관련된 외압은 없었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시급한 일이 아니’라며 유가족과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순직 처리를 우선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무원재해보상법은 ‘공무수행 또는 공무와 관련한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했다는 상당한 인과 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 공직자의 공무상 재해를 인정하고 있다. 유 위원장은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상규명 없이 순직 처리를 하기 어렵다는 반박도 나왔다. 박중배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대변인에 따르면 보통 순직 처리는 6개월 정도 소요된다. 이때 지인들의 증언, 통신 내역, SNS 메시지 등을 통해 고인이 사망한 이유를 규명한다. 박 대변인은 “순직 절차는 아주 까다롭다. 보통 진상규명이 없으면 순직 처리가 어렵다. 돌아가셨다고 모두 순직 처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권익위 내부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김 국장 죽음이 정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만도 그중 하나다. 권익위 한 고위 관계자는 8월 22일 일요신문에 “김 국장이 디올백 조사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권익위에서 하는 모든 조사는 쉬운 게 없다. 김 국장이 다른 건을 할 때도 하소연 같은 것을 할 때가 있었다”면서 “디올백 하나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몰아가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국장과 가깝게 지냈던 전직 권익위 관계자는 “(입장을 밝히기) 조심스럽다. 김 국장이 왜 그렇게 됐는지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지만, 나로선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죽기 며칠 전 통화할 때 전혀 몰랐다”면서도 “언론이나 민주당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제(디올백)로 고민했던 것은 맞다. 만약 누군가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면, 평소 그의 성격을 떠올려봤을 때 많이 힘들어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김 국장이 남긴 쪽지 형식의 유서를 확보했다. 유서에는 심신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유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