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대표, 의대 증원 유예 제안에 용산 즉각 반발 파문 커져…‘의도된 도발’이라면 현재로선 무리수 중론
한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자신이 제안했던 채 해병 특검법은 사실상 거둬들였지만 용산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의대 증원을 건드렸다. 용산에서 “병 주고 약주나”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의도된 도발’이라는 해석이 번져 나가면서 폭발음을 키울 화약은 켜켜이 쌓여가는 형국이다.
#또 다른 폭탄 투척
한동훈 대표는 8월 26일 오전 용산은 물론, 친윤 주류와 주파수를 맞추는 큰 뉴스를 하나 띄웠다. 더불어민주당이 자신을 향해 ‘채 해병 특검법’을 발의하라고 압박하는 데 대해 “그걸 따라갈 이유는 없다”면서 자신이 제안했던 제3자 방식 특검법에 대해 사실상 처음으로 ‘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읽혔다.
한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열흘 안에 법안을 발의하라’는 지난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 요구에 대해 “왜 그래야 하나. 민주당 입장에선 정치 게임으로 봐서 여권 분열 포석을 두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한 대표는 “원칙적으로 보면 특검은 수사가 진행된 이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의 입장이자 당론이기도 했던 ‘수사 먼저, 미진하면 특검 검토’ 스탠스로 발을 옮겨놓은 모양새다.
한 대표는 지난 6월 23일 대표 출마 회견에서 ‘차기 대표가 되면 공수처 수사 종결 여부와 무관하게 제3자가 공정하게 특검을 고르는 내용의 채 상병 특검법안을 발의하겠다’고 했고, 내내 이 입장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8월 26일 발언은 그동안의 태도와는 백팔십도 달라진 것으로 한 대표가 당정 간 조화와 협력의 리더십을 가져가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이 전망은 몇 시간도 못가 깨졌다. 한 대표가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밝힌 바로 그 전날 또 다른 폭탄을 용산을 향해 던졌다는 사실이 8월 26일 오후 늦게 알려졌다. 한 대표는 8월 25일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을 보류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모집하는 내년도 의대 정원을 최대 1509명 확대하기로 한 정부 결정은 유지하되,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을 재검토하자는 내용이었다.
여권에서 한 대표 발언을 반박하는 입장이 쏟아져 나왔다. 첫 주자는 한덕수 국무총리였다. 한 총리는 한 대표가 이틀 전 고위당정협의회가 끝난 직후 자신에게 2026학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을 유예하자고 제안했지만, 정부와 대통령실은 검토 끝에 한 대표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8월 27일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오찬간담회에서 이같이 전했다.
한 총리 다음으로 한 대표를 때린 사람은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다. 그는 8월 28일 의원총회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한동훈 대표의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 제안과 관련해 “사전에 심도 있게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당론이 아니라 한 대표가 불쑥 던진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이어 추 원내대표는 “의료 개혁은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추진돼야 한다”며 “정부 추진 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당도 함께할 생각”이라고 했다.
화룡점정은 대통령실이 찍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8월 28일 기자들과 만나 “현재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한 대표의 제안은 검토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실은 8월 30일 예정됐던 윤석열 대통령과 한 대표 등 여당 지도부 만찬도 추석 연휴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만찬 회동은 한 대표가 증원 유예 제안을 대통령 앞에서 직접 테이블에 올릴 것으로 예상돼 정치권과 의료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통령실은 연기 이유로 “민생 대책을 고민하는 모습이 우선”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연기 발표 시점이 한 대표의 증원 유예 제안 직후란 점에서 양측 불화에 따른 것으로 풀이됐다. 대통령실 제안에 따라 예정됐던 만찬이 다시 대통령실 요청으로 연기된 것인데, 결국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한 대표 측과 용산의 갈등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8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최근 불거진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의 갈등설과 관련해 “다양한 현안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게 자유민주주의 아니겠나. 당정 간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국민의힘 주류인 친윤계는 부글부글 끓는 모습이다. 당정이 똘똘 뭉쳐나가도 이재명 대표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툭하면 엇박자를 내니 다수 야당과 겨룰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용산 출신 한 정치권 인사는 “의대 증원이라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의제는 물밑에서 협의해야지 공개적으로 들고 나오면 될 일도 안 된다”면서 “요즘 한 대표의 행동을 보면 대통령실에 병 주고 약 주는 행위를 하는가 하면 답을 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순전히 자기정치를 하고 있다”고 발끈했다.
#쌓이고 있는 화약
한동훈 대표가 의대 정원 문제를 꺼내들면서 용산과 각을 세우는 것은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의도된 행동으로 읽힌다. 용산 핵심 국정과제에 대해 당대표가 엇박자를 내면 윤 대통령이 격노할 사안인데 이 부분을 건드린 것은 누가 봐도 작심한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이유다.
한 대표 측은 의료 현장을 바라보고 걱정하는 국민 눈높이를 고려한 판단이라고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불안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본다. 60%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로 당대표가 됐지만 등판 한 달을 넘기고도 ‘한동훈식 정치’를 보여주지 못한 채 조용한 행보만 하는 것이 대한 비판론이 일자 공격 태세로 방향타를 전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대표를 지지했던 당내 세력과 지지층은 한 대표가 취임 이후 주특기인 ‘사이다’가 아닌 ‘고구마’만 내밀고 있다는 볼멘소리를 해왔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한 대표가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듯한 느낌이다. 집권당 대표가 최종 목적지라면 모르겠는데, 아니지 않는가”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 대표에게 조선제일검을 다시 휘두르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한 대표가 ‘의대 증원 유예’를 언급하며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이지만, 여권 안팎에선 “너무 세게 나갔다”는 지적도 쇄도하고 있다. 의료개혁의 경우 당정이 엇박자를 낼 사안이 아니라는 반응이 여권에선 주를 이룬다. 중도층에선 여전히 정부 방침에 대한 지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용산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한 대표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아쉽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한동훈 대표에게 큰 권한을 줬고, 미래를 짊어질 인재로 키워왔는데 한 대표의 이런 행태는 ‘배은망덕’이라는 게 용산 출신과 친윤계 인사들의 한목소리다. 이들은 한 대표가 ‘배신자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윤 대통령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한 친윤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한 대표가 갈 길이 아니다. 박근혜는 원래 이명박이랑 싸웠던 정치인이다. 한 대표가 윤 대통령과 싸운다고 ‘윤석열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럴수록 지지층에선 배신자 비판만 커진다. 철저하게 윤 대통령의 후계자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윤 정부가 성공해야 한다.”
#불붙는 것만 남았나
당 안팎에서는 윤·한 갈등이 이제 말로 풀 수 있는 단계를 지나 힘으로 부딪히는 열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은 8월 29일 국정브리핑 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한 대표와 갈등이 없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의대 증원에 대해 강한 의지를 드러내면서 한 대표에 대해 우회적으로 강한 불만을 폭발시켰다는 해석을 불러왔다.
윤 대통령은 8월 29일부터 이틀간 인천국제공항공사 인재개발원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연찬회에도 가지 않았다. 한동훈 대표 체제 출범 이후 첫 연찬회라 의미가 크지만 윤 대통령은 관례를 깨고 불참했다. 윤 대통령은 2022년 8월 25일, 지난해 8월 28일 연찬회에 참석했고 올해 연찬회도 참석이 거의 확정적이었지만 결국 불발됐다. 한 대표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노출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대표 역시 여당 연찬회에 정부 측 의료개혁 책임자들이 대거 찾아와 정원 확대 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했지만 이 장소에 다른 일정을 이유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추경호 원내대표 요청으로 마련된 중요 일정이었지만 한 대표는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장면들만 봐도 윤·한 갈등이 거친 충돌로 확산 중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향후 윤·한 갈등의 승부를 가르는 힘은 여당 내 세력 분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당의 주류 세력은 친윤이다. 한 대표로선 친윤계의 세력 전이 없인, 현재권력인 현직 대통령과 힘의 우위를 겨루기 어렵다. 한 대표가 최근 당내 현역 의원들과의 일대일 대화를 통해 각개격파에 나서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스킨십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세력을 키우는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원내대표에 윤석열 정부 1기 내각 중심이었던 추경호 의원이 자리하고 있고 당내 현역 의원들 대다수가 여전히 친윤이라는 점에서 한 대표로의 세력 전이가 급속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예측을 하는 이들은 당내에서 소수다. 현 구도상 미래권력 한 대표에 일단 불리한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여러 정권을 경험한 국민의힘 한 중진 의원은 “정치인은 힘이 생겼을 때 힘을 쓰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데 힘을 쓰면 힘이 실리지 않고 상대가 힘으로 느끼지도 않는다”며 “이명박 정부 때 이 대통령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힘을 자주 쓰는 것보다는 힘을 응축하면서 때를 기다렸다”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