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연수원 ‘청탁금지법의 이해’엔 배우자 금품수수 행위 금지 강조…권익위 “과거에도 동일 내용”
#부패인식지수 윤 정부 때 뒷걸음질
2011년 12월 5일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이 터졌다. 이날 새벽 전직 검사인 30대 여성 이 아무개 씨가 서울 자택에서 긴급체포돼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압송됐다. 이 씨는 검사 시절 다른 검사가 맡은 사건을 처리해주는 대가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최 아무개 씨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알선수뢰)를 받고 있었다.
이 씨는 2007년경 최 변호사와 내연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 변호사는 아파트 임대료를 대신 내줬고, 보석이나 명품 등의 선물을 여러 차례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2월에는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이 씨에게 내줬다. 이 씨는 최 변호사의 법무법인 명의 신용카드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이 무렵 최 변호사는 이 씨에게 고소 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부탁했다. 당시 최 변호사는 부동산 사업 동업자를 횡령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고소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지지부진하다고 판단되자 이 씨에 민원을 넣은 것이다. 이 씨는 담당 검사에게 사건 처리를 가급적 신속하게 해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알선수뢰가 아닌 알선수재 혐의를 적용했다. 알선수뢰는 공무원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공무원 업무에 영향을 주는 것을 대가로 뇌물을 받는 경우다. 검찰은 이 씨가 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부탁하는 것과 관련해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검사 지위를 이용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씨는 법무법인 명의의 신용카드는 내연관계였던 최 변호사가 이전부터 해오던 경제적 지원 차원이라고 했다. 벤츠는 ‘사랑의 증표’일 뿐 알선 대가는 아니라고 항변했다. 1심 재판부는 이 씨의 알선수재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과 추징금 4462만 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혀 무죄가 나왔다. 2심 재판부는 이 씨가 동료 검사에게 전화한 것은 내연관계인 최 변호사를 위해 호의로 한 행위라고 봤다. 대법원도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이 판결이 나오자 끊임없이 발생하는 공직자 부패·비리 사건 근절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은 2013년 8월 ‘부정청탁 및 이해충돌 방지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청탁금지법은 김영란 위원장의 이름을 따 김영란법으로 불린다. 법은 2016년 9월 28일부터 시행됐다.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은 헌법기관,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직유관단체, 각급학교, 학교법인, 언론사 등 공공기관과 이 기관에 종사하는 공무원, 교직원, 언론사 대표자 및 임직원 등이다. 법에 따라 설치된 위원회에 소속된 공직자가 아닌 위원이나 민간에서 공공기관에 파견된 사람도 청탁금지법 테두리 안에 있다.
법 적용 대상자는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해 들어온 부정청탁을 받는 것이 금지된다. 직무와 관련된 금품은 수수할 수 없고, 관련 없는 경우에도 1회 100만 원(매 회계연도 300만 원)을 넘는 금품 등은 받을 수 없다. 대상자가 직무·지위·직책 관련 교육·홍보·토론회·세미나·공청회·강의·강연·기고 등을 하려면 기관장에게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다음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 CPI)는 확연히 개선됐다. 부패인식지수는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청렴도 인식 조사다. 세계은행, 세계경제포럼 등 10여 개의 조사 기관이 조사를 실시한다. 조사 기관은 매년 일부가 바뀐다.
청탁금지법이 처음 시행된 2016년 한국 부패인식지수는 전 세계에서 53위였다. 법 시행 이후 순위는 꾸준히 올라갔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39위로 처음 30위권에 진입했다. 윤석열 정부 첫해인 2022년엔 3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023년 32위로 떨어졌다. 청탁금지법 시행 7년 만에 처음으로 순위가 하락했다. 현재 한국은 뉴질랜드(3위) 싱가포르(5위) 호주·홍콩(14위) 일본(16위) 부탄·아랍에미리트(26위) 대만(28위) 등의 아시아권 국가보다 순위가 낮다.
한국투명성기구는 지난 2월 6일 발간한 부패인식지수 분석 결과에서 “사회 전반의 반부패 노력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투명성기구는 “정치와 경제영역의 부패지표가 나빠지고 있다”며 “사회 상층의 부패가 핵심적인 사회문제로 지적됐고, 우리나라 부패가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로 특징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반부패·청렴사회로 나아가는 길이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권익위 카드뉴스 논란
지난 8월 21일 청탁금지법 주무 부처인 권익위는 ‘2024 추석 명절 청탁금지법 바로 알기’ 카드뉴스를 배포했다. 적용 대상자들이 혼선을 겪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카드뉴스에는 ‘직무와 관련 없는 공직자에게는 100만 원까지 선물도 가능합니다’ ‘공직자인 친족(8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배우자)에게는 금액 제한 없이 선물 가능’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 내용을 두고 권익위가 사실상 ‘뇌물 가이드’를 배포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부패인식지수가 뒷걸음질 치고 있는 상황에서 주무 부처인 권익위가 안이한 인식을 드러냈다는 지적도 뒤이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배우자’라는 문구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사건’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6월 14일 권익위는 김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권익위가 김 여사를 봐줬다는 논란이 거세지자 정승윤 권익위 부위원장은 7월 9일 이례적으로 브리핑을 열고 “청탁금지법상 제재 규정이 없는 공직자 배우자에 대해서는 헌법의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제재할 수 없으므로, 처벌을 전제로 한 수사 필요성이 없어 종결했다”고 했다.
권익위원장 출신 전현희 민주당 의원은 8월 2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권익위는 청탁금지법을 무력화시키더라도 김건희 씨에 대한 무혐의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전 의원은 “학교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 잘 교육시켜줘서 고맙다고 학부모가 음료수 한 병 선물해도 청탁금지법 위반이라고 하고, 스승의날 학교에서 카네이션마저 사라지게 만든 권익위였다”며 “그런 권익위가 배우자에게는 수백만 원 명품백 선물을 마음껏 제공할 수 있다고 면죄부를 공개적으로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일자 권익위는 “해당 카드뉴스는 법 적용대상 공직자가 아닌 일반 국민들도 청탁금지법 때문에 선물하기 꺼려진다는 오해가 있어, 지난 2018년부터 선물을 많이 주고받는 추석·설명절을 앞두고 ‘청탁금지법 바로 알기’의 일환으로 국민들이 궁금하신 사항을 알기 쉽게 카드뉴스로 제작해 알려오고 있다”며 “이번 카드뉴스 역시 2024년 추석 명절을 앞두고 과거에 배포되었던 카드뉴스와 동일한 내용으로 구성하였음을 알려드린다”고 해명했다.
권익위의 해명대로 과거 추석 때 배포된 홍보자료를 보면 이번 카드뉴스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형식이 달랐다. 2022년 8월 10일과 2021년 9월 2일 배포된 홍보자료에서는 친척 중 공직자가 있는데 명절 선물을 얼마까지 가능한지 묻는 말에 ‘직무와 관련이 없으면 100만 원까지 가능합니다. 공직자인 친족(8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배우자)에게는 금액 제한 없이 선물이 가능합니다’라고 답변하는 식이다. 자주 들어오는 질문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법령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2020년 9월 11일 카드뉴스에서는 농축수산 선물 상한액을 20만 원으로 일시 상향하는 내용을 홍보하는 내용을 담았다. 권익위는 코로나19와 태풍피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업계 종사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선물 가액 범위를 상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100만 원까지 선물 가능하다거나 배우자에게 금액 제한 없이 선물 가능하다는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다.
2017년 9월 13일 배포된 포스터에는 직무와 관련 없는 경우 ‘친지·이웃의 경우 금액에 제한 없이 선물 가능’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다만 허용범위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는 자료를 첨부했다. 자료에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논란이 된 이번 카드뉴스엔 이러한 설명자료가 없다.
또 카드뉴스가 권익위 청탁금지법 교육자료와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교육자료는 권익위 청렴연수원에서 사용한다. 청탁금지법과 그동안 수집된 위반 사례에 기초해 제작됐다. 통상 청탁금지법 가이드라인으로 불린다. 연수원은 신규 공무원, 승진 대상자, 고위직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찾아가는 청렴체험교실’도 운영한다.
일요신문은 청렴연수원 홈페이지에 등록된 ‘청탁금지법의 이해’를 분석했다. 카드뉴스와 달리 ppt 36페이지 분량 자료에서는 ‘가능’이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부정청탁 사례 소개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수련원 객실 이용 부탁’ ‘직무수행 저해 우려가 있는 경우 외부 강의 등 제한 가능’ 등의 내용뿐이다.
‘허용’이라는 단어는 총 4번 나온다. ‘허용되는 금품 등 8가지’ ‘가액범위 안의 음식물(3만 원), 선물(5만 원), 경조사비(5만 원) 예외적 허용’ ‘허용 기준을 벗어난 금품수수 금지’ 등이다. 이 밖에는 대부분 ‘직무관련 여부와 관계없이 금품을 수수하는 것을 금지’처럼 ‘금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배우자’라는 단어는 총 10번 등장한다.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수수 행위 금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료에서는 ‘공직자 등 배우자의 금품 등 수수 금지’를 주제로 한 페이지를 할애했다. 관련 내용이 있는 청탁금지법 제8조 4항과 제22조 제1항 제2호를 소개했다. ‘공직자 및 공직자의 배우자에게 금품 제공·약속·의사표시 금지’ ‘배우자의 금품수수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신고’ 등의 문장을 넣어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수수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했다.
앞서의 카드뉴스에 나오는 예외조항을 설명하는 대목도 있다. ‘일상생활 속 청렴으로의 의식전환’에서는 직무 관련성이 없는 경우 1회 100만 원, 1년 300만 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한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더치페이’를 강조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관행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사자나 배우자가 선물을 받으면 즉각 신고하고 반려하도록 유도해 청렴한 문화를 조성하는 게 청탁금지법의 목적이다. 연수원의 자료는 이 취지에 부합하도록 제작된 셈이다. 한 전문가는 권익위 카드뉴스에 대해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