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과 풍요를 바라며 임금이 친히 행한 국가적 제사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품격을 갖춘 국가적인 제사를 말한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6874656590.jpg)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을 마련했다.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지방에도 사직단을 두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사직은 동쪽의 사단(社壇)과 서쪽의 직단(稷壇), 두 개의 단으로 구성되는데, 사단에는 ‘국토의 신’인 국사(國社)의 신주를, 직단에는 ‘오곡의 신’인 국직(國稷)의 신주를 모셔 놓았다. 제사는 보통 2월과 8월에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왕이 친히 행하는 사직제의 의식은 제사 전부터 그 일정이 이미 시작된다. 왕은 제사가 시작되기 전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했다. 제사 3일 전부터는 제사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차려놓고, 제사 하루 전에는 왕이 사직단으로 향하기 위해 거가(임금의 수레)를 타고 궁을 나섰다.
![사직대제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6930099003.jpg)
사직제에서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亞獻),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終獻), 제사 지낸 술과 고기를 나누는 음복수조(飮福受곞)에 이어 제기를 거두는 철변두(徹憐豆), 그리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는 망예(望績) 절차가 이어진다. 이러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면 왕의 거가는 다시 궁으로 향한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면 궁의 정전에서 이를 경하하는 의례, 즉 하의(賀儀)가 열린다. 하의에 이어서는 제사 지낸 술과 음식을 나누는 음복연(飮福宴)이 열리는데 왕과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의빈, 제관(祭官) 등이 모두 참석하여 음복연까지 행하면 사직제는 마무리된다.
![사직대제는 국가적 제사에 사용되는 음악과 무용, 의복 등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무형유산이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6957302339.jpg)
사직제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천체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종대의 ‘세종실록오례의’를 비롯해 성종대의 ‘국조오례의’와 ‘국조오례서례’,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와 ‘국조속오례의서례’, 정조대의 ‘국조오례통편’ 등에 사직제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정조대에는 오례서가 아닌 의궤에 사직제를 기록한 ‘사직서의궤’가 처음 편찬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종묘와 사직단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이어(移御)해야 했고, 종묘와 사직단이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기도 했다. 그 후 이를 복구하였지만 정유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다시 신주를 옮기는 일이 빚어졌다. 사직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시절과 순종 초기에도 행해졌으나,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해졌다. 사직단 또한 공원을 만든다는 구실 아래 훼손되었다.
![사직단 전경. 사진=국가유산청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7021966729.jpg)
자료 협조=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