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정부가 미분양 아파트를 나랏돈으로 사들이기로 했다. 건설사 부도와 그에 따른 일자리 상실 등 국민 피해를 막겠다는 명분에서다.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비슷한 대책을 내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덕적 해이 우려가 크다. 14년 전에는 외부 충격이 어느 정도 원인이 됐지만 최근의 사태는 건설사와 금융사, 지방자치단체의 과도한 이익 추구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사실상 나랏돈인 공기업 재원으로 민간의 부실자산을 인수한다면 안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악성 미분양' 3000가구를 LH가 사들이는 방안을 정부가 내놓았다. 경기 평택시 한 아파트 견본주택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정부는 지난 2월 19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민생경제점검회의를 열고 ‘지역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내놨다. 부산·대전·안산에서 4조 3000억 원 규모의 철도 지하화 사업을 벌이겠다는 내용이 머리에 담겼지만 핵심은 악성 미분양 3000가구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들이는 방안이다. LH가 지방 미분양 직접 매입에 나서는 것은 2010년 이후 15년 만이다. 매입 신청을 받아 상황에 따라 규모 확대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방 중심의 건설수주 감소 영향으로 투자·고용 부진이 장기화하고, 준공 후 미분양이 느는 등 부동산 시장이 위축돼 지역경제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며 “정부가 지방 건설경기 회복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준공 후 미분양은 2만 1480가구다. 1년 새 2배 늘었다. 준공 후 미분양의 80%(1만 7229가구)는 지방에 있다. LH는 2008~2010년 준공 후 미분양 7058가구를 분양가의 70% 이하로 ‘역경매’ 매입했다. 매입한 주택은 공공임대 후 분양될 계획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미분양 물량 증가는 금융권과 건설업계의 과도한 개발 탐욕 탓도 컸지만 리먼브라더스 파산에 따른 미국발 충격이 뇌관이 됐다. 국내 건설사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어 정부가 지원에 나설 명분이 됐다. 당시 국회까지 나서 미분양 해소를 위한 세제 혜택(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한시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정부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규제를 강화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월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민생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최근의 미분양 문제는 당시와는 다르다. 금융권과 건설업계의 과도한 탐욕은 같지만 리먼브라더스 파산 같은 파괴적 외부 충격은 없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초고강도 긴축과 관계는 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정도의 위력은 아니다.
택지 개발은 지방자치단체의 인허가, 금융권에서의 자금조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적정 수요와 미분양 위험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초저금리에서 계속된 부동산 호황에 편승해 개발이익을 추구하려던 건설사와 금융회사, 지방자치단체는 그 위험을 간과했다.
미분양 문제가 가장 심각한 대구를 보면 2021~2023년 6만 2000세대의 아파트가 공급됐다. 연간 적정 수요인 1만2000세대보다 5배나 많다. 2023년 공급량은 3만 8000세대로 수요 대비 316% 과잉 상태였다. 대구의 미분양은 2023년 2월 1만 3987세대로 정점을 기록한 후 지난해 6월 9738세대, 올 2월 8807세대로 감소세다. 하지만 여전히 준공 후 미분양은 2674세대로 전국 최다다.
대구뿐 아니다. 수도권도 2023년 공급량이 9만 3743세대로 적정수요 6만 4000세대보다 46%나 많았다. 그 결과 올해 2월 기준 미분양은 1만 2954세대로 전국 1위다. 대전도 2023년 공급량이 적정 수요(1만 2000세대)의 3배가 넘는 3만 8000세대에 달했다. 계속된 부동산 호황에 돈 빌려 땅을 산 뒤 아파트를 짓기만 하면 비싸게 팔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뛰어든 결과다. 실제 최근 10년 새 가장 돈을 많이 번 이들이 부동산 개발회사, 이른바 시행사와 이들에 돈을 빌려준 금융권 관계자들이다.
정부 대책의 효과를 두고 전문가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먼저 매입 대상이 준공 후에도 미분양이 될 정도로 매력이 없는 주택이다. 공실이 나거나 임대 후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LH의 손실이다. LH의 재원은 괜찮은 입지의 비아파트를 사서 공공임대할 예산 5000억 원 가운데 3000억 원이다. 건설사 돕는 데 예산을 빼서 쓰다 공공임대 실수요자 혜택만 줄이는 꼴이 될 수 있다.
3000세대를 매입한다고 미분양 문제가 얼마나 해소될지도 미지수다. 건설업계는 금융이나 취득세나 양도소득세 감면 같은 세제지원 방안이 포함되지 않아 지방 부동산 시장이 회복하는 데는 제한이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정원주 주택건설협회 회장은 “지방의 준공 후 미분양이 급증하고 있고 지역 건설사의 경영난으로 하도급 업체의 연쇄부도가 우려되는데 3000가구 매입으로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며 “매입 물량을 내년까지 2만 가구로 늘리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완화, 미분양 취득 시 취득세 중과 배제 등 특단의 수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지방 미분양 사태의 근본 원인은 과잉공급이다.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려던 이들을 위해 금융이나 세제상의 특혜를 제공하기는 쉽지 않다. 정부가 이번 대책을 내놓은 배경으로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해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세제 혜택을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국회 과반을 확보한 데다 조기 대선 승리가 유력한 야당이 현 정부 주도의 선심성 대책에 호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야당 입장에서는 조기 대선 때 자신들의 부동산 공약을 내세워 표심에 호소하는 게 낫다. 이를 간파한 듯 정부 내에서도 가장 엘리트 집단으로 꼽히는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는 이번 대책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세제 혜택이나 금융 지원이 빠진 것은 그 증거다. 이번 대책을 주도한 것은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현직 이한우 LH 사장의 전임자다.
지방 미분양, 금융 대책 효과 볼 수 있을까?
악성 미분양 아파트 문제 해결을 위해 나랏돈까지 투입해야 하는 지방과 달리 서울은 규제 하나 풀었을 뿐인데 집값이 급등하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준공 후 미분양을 매입하고 금융회사에 대출을 독려하는 대책을 내놨지만 이 같은 양극화는 좀처럼 해소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바라본 서울 아파트 단지 전경. 사진=최준필 기자한국부동산원이 지난 2월 20일 공개한 2월 셋째 주 아파트 가격 동향 조사를 보면 서울 아파트값은 지난주(0.02%) 대비 0.06% 올라 상승폭이 확대됐다. 특히 강남3구인 송파(0.14%→0.36%)는 0.22%포인트, 강남(0.08%→0.27%)은 0.19%포인트, 서초(0.11%→0.18%)는 0.07%포인트 각각 올랐다. 지난 2월 12일 서울시가 송파구 잠실동, 강남구 삼성·대치·청담동 등을 포함한 아파트 291곳에 대해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을 해제한 데에 따라 강남을 중심으로 아파트 매매 가격이 상승했다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다.
정부가 지난 2월 20일 발표한 ‘지역 건설경기 보완방안’ 방안을 보면 △지방 준공 후 미분양 주택 구입 시 디딤돌 대출 우대금리 신설 △금융기관이 지방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취급을 확대할 경우 가계부채 관리상 인센티브 부여 △지방 건설경기 상황 등을 보아가며 3단계 스트레스 DSR(7월 시행 예정)의 구체적인 적용범위 및 비율 등을 4~5월 중 결정 등이 담겨있다. 하지만 대출 이자를 낮추고 총량을 늘리고 대출 한도를 줄이지 않는다고 지방 미분양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한국은행 금융통계를 보면 2024년 기준 전국 예금은행 주담대 잔액의 지역별 비율은 지방이 30.6%. 수도권이 69.4%다.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12년 말 기준은 각각 20.9%, 79.1%였다. 이 기간 주담대 잔액 증가율을 봐도 지방이 165.2%로 수도권의 115.6%를 크게 앞선다. 주담대가 덜 나가 집값이 덜 오르거나 미분양이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지방에 더 많은 주담대가 실행된 만큼 다급히 금융권에 대출을 더 독려해도 DSR 규제와 불투명한 집값 전망 등으로 실제 지방의 주택수요가 즉각 되살아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