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괭이로 파버리듯 외교자산 훼손…김대중 ‘남북 4원칙’ 노태우 ‘북방 외교’ 복원해야”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지낸 ‘외교·안보통’으로 현 22대 국회에서 한미의원연맹 공동회장을 맡고 있는 정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을 접견하기도 한 정 의원은 지난 26일 ‘일요신문i’와 만나 “윤석열 정부는 내치도 문제지만 외교 붕괴는 훨씬 더 심각하다”며 답답해 했다. 그는 미국 측의 민감국가 지정 조치를 두고 “(한국이) 동맹을 배반한 결과”라며 윤 대통령의 경솔한 핵무장 발언이 미국과의 신뢰를 무너트렸다고 지적했다. 남북 관계와 한중·한러 관계가 사실상 3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평가했다. 반전의 계기로 트럼프 정부가 북한과 소통에 나선다면 이를 지지하면서 우린 우리대로 다른 주변국들과 외교를 재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바이든 정부)가 올해 초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에 올렸다. 국내에서 고개 든 핵무장론, 비상계엄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 미국 내부의 중요 과학기술 보안 문제 등이 그 배경으로 꼽혔다. 현재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미국 정부의 시선은 어떻다고 보나.
“동맹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다는 것은 동맹에 구멍이 뚫린 것이고, 미국이 한국을 위험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윤 대통령이 202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체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 미국의 강한 경계심을 불러온 결정적 계기였을 것이다. 수십 년의 한미정상회담 역사에서 한국 대통령에게 NPT(핵확산방지조약) 준수를 요구한 사례가 없다. NPT 회원국이면서 핵무장 의지를 밝히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권은 국민을 속였고 동맹을 배반했다.”
—윤석열 정부 이후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미국 싱크탱크나 상하원에선 어떤 기대가 나오나.
“미국이 기대하는 건 특정 인물군이나 세력이 아닌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회복력이다. 지난 2월 국회 대표단으로 미국에 갔을 때 회의 등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는 ‘Resilience of the korean democracy’(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였다. (미국은) 우리 국민을 통해 헌정 질서가 빠르게 회복해 나가는 모습을 봤고, 희망을 한국 국민에게서 본다는 인식이 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자국 안보는 자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기조가 지속될 경우 국내에서도 자체 핵억제력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올 수 있는데 현실적 대안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핵무장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미국의 전략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NPT 체제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핵무장을 할 수 없다. 북한을 봐라.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됐지만 북한은 1993년 3월 NPT를 탈퇴하며 핵무장을 진행했다. 현재 북한은 60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NPT를 탈퇴한 유일한 국가는 북한이고, 그 결과 지금도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다. 우리가 북한의 길을 따라갈 순 없다. 핵무장론은 대중 선동용일 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적용된 ‘비핵화 위반 제재’를 해제하는 협상을 재개할 경우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 한국이 협상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있을까.
“현 상태로선 한국의 역할이 없다. 그래서 문제다. 남북 관계는 지금 적대와 증오로 얼룩졌고, 북한은 한국을 ‘적대적 두 국가’로 선언했다. 외교적으로 한국이 빠진 자리를 지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대신하고 있다. 2018년 평창올림픽 때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했던 시절과는 비교 안 될 정도로 (외교가) 후퇴됐다. 다만 톱다운 방식의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이는 환영할 일이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2019년 2월) 이후 멈췄던 대화가 6년 만에 재개되면 우리는 이를 지지해야 한다.”
—북핵 문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법을 현재 예측하기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의 북핵 협상 재개가 문재인 정부 때와 비교해 어떤 차별점을 가질 것으로 보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시기 우리 외교력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탄핵을 당했지만, 남북·한중·한러 관계가 지금처럼 무너지진 않았다. 같은 탄핵심판을 받는 정권이지만 윤석열 정부의 외교 역량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상황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외교의 복원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가 한미동맹 하나만 붙잡고 일방통행식 ‘1극 외교’에 치중했기 때문에 남북 관계는 증오와 적대의 관계로 추락했고, 한중 관계는 소원해졌고, 러시아와는 비우호적인 관계가 됐다. 2년 반 만에 곡괭이로 파버리듯 외교 자산을 훼손했기 때문에 (외교력을) 복원해야 한다.”
—현 트럼프 체제 아래에서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 균형을 맞추며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실질적 외교 전략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 외교 전략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남북 4원칙’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를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먼저 DJ의 남북 4원칙은 △쉬운 것부터 합의하고 어려운 것은 뒤로 미뤄 협상한다(선이후난) △민간이 먼저 나서고 정부는 뒤따른다(선민후관) △경제 협력을 우선한다(선경후정) △먼저 주고 나중에 얻는다(선공후득) 등이다. 여기에 노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를 더해야 한다.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교 관계가 없던 중국, 러시아 등과 국제협력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지난 30여 년간 외교의 기반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멸공’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영 외교를 고집하며 외교를 내치보다 더 심각하게 훼손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축으로 하되 중국·러시아·북한과도 평화 공존을 도모해야 한다. 30여 년간 우리는 ‘부챗살 외교’로 대륙과 해양 세력 모두를 연결하며 경제 영토를 확장해 왔다. 타 국가들에 교량 역할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 한류가 퍼지고 국익도 얻었다. 부챗살 외교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안타깝다. 그 이유는 헌법재판소(헌재)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헌재 자리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의 집터다. 박규수는 자신의 집에서 김옥균 등 제자들을 불러모아 세계가 변하는 모습을 전했고, 당시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 인물들은 이곳에서 한국 근대화를 꿈꿨다. 이후 1987년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희생,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며 국가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1988년 헌재가 설립됐다. 헌재는 지금 역사 정신을 저버리고 있다. 계엄을 생중계로 모든 국민이 지켜봤는데 말이다.”
—야권에선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일으키기 전부터 정권이 붕괴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정권의 균열이 시작됐다고 보는가.
“윤석열 정권의 균열은 김건희 여사에서 시작됐다. 결정적 전환점은 2023년 4월 27일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주가조작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김건희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이다. 이날 이후 윤 대통령의 언행이 급격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반국가 세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이를 척결해야 한다는 기조가 본격화했다. 두 달 뒤인 6월 대통령실 핵심 인사가 속초의 HID(북파공작부대)를 방문했다. 여긴 평시에도 군단장·사단장이 쉽게 가지 않는 곳이다. 김건희 특검법 통과 이후 정권이 비상한 조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이라고 본다. 이후 같은 해 11월 7일 국군방첩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육군특수전사령부 지휘부(여인형·이진우·곽종근)에 ‘충암파’와 그 세력을 동시 임명한 일이 이어진다. 윤 대통령은 다음 해인 2024년 중반 ‘비상대권이 아니면 (나라를) 정상화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결국 김건희 특검법이 성냥에 불을 붙인 것이고, 이후 정권의 목표는 ‘성공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다 쓸어버리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이 흐름이 정권의 균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신호라고 본다.”
—여당이 윤 대통령의 내란에 동조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 상황에서 여당은 어떤 위기 관리 전략을 보여줘야 한다고 보나.
“공존하려고 해야 한다. 정치는 공존에서 시작된다. 또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여당은 그저 기계일 뿐이다. 대통령실의 ‘팔다리’ 역할만 하고 있다. 당 대표들조차 정권의 두뇌가 아닌 수족에 불과했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지난 2년 반 동안 ‘정적 죽이기’에 몰두했고, 이를 위해 집권 2년 반 동안 투입된 검사만 60~70명에 달한다. 국가의 국력을 낭비한 것이고 정치의 실종이다. 여기서 여당의 정치 본연의 역할은 없었다.”

“진영 대결이 심화될 수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회복에 힘써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정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또 경제 회복도 마찬가지다. 민생경제는 지금도 끝없이 추락 중이다. 지난해 10월 예측된 2025년 성장률 전망은 2.1%였지만 이후 계속 하락해 1.5%까지 내려왔고 자칫 더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회복이 이뤄지면 경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본다.”
—윤 대통령이 탄핵될 경우 정국 안정화 과정에서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가장 우려되는 것은 국민 간 극단적 분열과 갈등이다.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외치는 극우 시위 등에서 보이듯 우리 사회는 갈라지고 있다. 국민 통합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2002년 월드컵 때처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종교인과 지식인,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할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권도 ‘대한민국의 가치와 품격’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힘써야 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정신이 나왔다. 인내천 정신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의 가치를 담았다. 30만 명이 희생된 실패한 혁명이었지만 그 무덤 위에서 조선은 무너졌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이라는 ‘민’(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세워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역사적 자각이며, 인간의 존엄을 중심에 두는 헌법 정신이다. ‘인간의 존엄은 훼손될 수 없다’는 기본부터 다시 회복하도록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한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