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위 논의조차 안돼, 외교적 상황도 걸림돌…시민단체 “과거사 바로잡기 공약 이행 촉구”

사도광산 등재 후폭풍은 계속됐다. 일본은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한국이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노동자 추도식을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입장을 바꿔 추도식 불참을 결정했다. 일본 대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이 2022년 8월 15일 광복절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다. 이 보도는 오보로 밝혀졌다. 외교부는 ‘추도식 불참 결정은 제반 사정을 고려한 것’이라며 불참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2024년 11월 24일 일본은 단독으로 사도광산 추도식을 진행했다. 이쿠이나 정무관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회 상황이라고 해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갱내의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곤란한 노동에 종사했다”고 말했다.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11월 25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해방 이후 최악의 외교 참사”라고 비판했다. 2025년 추도식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 대통령은 7월 3일 기자회견에서 “한편으로는 과거사 문제를 아직 청산하지 못해 서로 고통을 받고 있다”며 “대한민국도 고통 받지만, 일본도 괴롭지 않겠나.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의 일부”라고 말했다. 다만 이 대통령은 실용 외교를 강조하며 한일협력과 과거사·독도 문제를 나눠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7월 29일 국무회의에서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씨(94)의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안을 심의·의결했다. ‘사전 협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며 훈장 수여를 하지 않았던 윤석열 정부 결정을 뒤집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7월 30일 입장문에서 “늦게나마 서훈 수여를 결정한 것은 다행이지만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다.
여전히 강제동원 진상규명 작업은 진행되고 있지 않다. 전담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강제동원 사적지 발굴과 피해 사례 기록 등을 전담했던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는 2015년 활동이 종료됐다. 위원회 기능은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국가유산청 등으로 이전됐다. 현재 강제동원 관련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피해 사례를 수집하는 기관은 전무하다(관련기사 [단독] 휘갈긴 ‘철거예정’만 을씨년스럽게…일제 강제동원 국내 유적지 방치 실태).

법안은 여전히 ‘심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법안은 ‘발의→상임위 심의→법사위 심사→본회의 의결→공포’ 등의 절차를 거쳐 통과된다. 2024년 10월 11일 소관위원회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회부됐다. 행안위는 2월 18일 법안을 상정하고 공식적으로 법안 심사 절차를 시작했다. 관련 위원회인 보건복지위는 2024년 10월 11일 법안을 회부한 이후 심사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
2월 18일 열린 전체회의에서는 법안에 대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전체회의는 상임위나 특위 소속 위원들이 모두 모여 진행하는 회의를 말한다. 이날 행안위 회의록을 보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대한 질의가 주를 이뤘다.
법안은 후 순위로 밀린 것으로 보인다. 행안위 소속 위원들은 법안 존재조차 모르는 모습이다. 한 행안위 관계자는 “행안위에 쌓여 있는 법안이 몇 천 개다. 법안 소위를 한 번 하게 되면 올라오는 것은 실제로 열 몇 개 수준밖에 안 된다”며 “여야가 우선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법안 (목록에서) 해당 법안을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 국정과제이거나 시급한 어떤 현안이 있어서 필요하거나 그런 (법안들이) 우선되는 것은 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 설치가 불발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동안 강제동원 관련 법안은 대부분 통과되지 않았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9~21대 발의된 법률안 26개 가운데 통과된 안은 두 건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 두 건은 위원회 활동 기간 연장 법안이다.
문희상 전 민주당 의원이 2019년 발의한 위원회 재설립을 골자로 한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019년은 문재인 정부 시기였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범여권이 165석을 확보한 상태였다. 일부 유족들 사이에서 일본의 강제동원 전담 기구조차 다시 만들지 않으면서 역사 왜곡 사태가 터질 때마다 민주당이 구호만 외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외교적 상황도 걸림돌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 등 외교 현안 대응을 위해 한일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과거사 문제를 뒤로 미뤘다. 한일 관계 개선에 방점을 둔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과의 합의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결됐다고 선포했다. 이 같은 기류 속에서 위원회 기한 연장도 불발됐다(관련기사 [단독] 피해자보다 한일관계에 방점…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여야 모두 불구경’).

2015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군함도를 앞 순번으로 정한 것도 아베 신조 당시 총리였다.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는 산업유산 등재를 요구할 논리를 제공한다. 센터장은 가토 고코다. 그는 일본 정치인 가토 무쓰키의 장녀다. 무쓰키는 아베 전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같은 파벌이다. 고코도 아베 전 총리 측근으로 분류된다. 그는 징용시설 역사는 일본 시각에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일본 정부는 ‘아스카·후지와라 궁도와 그 관련 자산군’을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역 역시 강제동원 사적지가 있다. 그 다음 등재가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구로베 댐이다. 이곳은 약 1200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곳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구로베 댐 강제동원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없다는 점이다. 관련 기록이나 축적된 학술 자료도 없다. 다른 산업유산 후보군에 대한 연구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관련기사 [단독] 제2의 사도광산? 일본 또 다른 유네스코 등재 후보지에도 강제동원 사적지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 조사를 통해 집계된 강제동원 피해자 수는 매년 급감하고 있다. 2015년 ‘1만 명선’이 무너졌다. 2020년 3140명에서 2024년 1월 기준 904명으로 집계됐다. 남은 생존자들도 대부분 90대 고령이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정의기억연대 등 총 650여 개 시민단체는 8월 6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 공약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우리가 일본에 대한 적극적 입장 표명과 대응을 자제해야 한다며 진실을 감추는 것은 오히려 일본의 독도 문제, 역사 왜곡 등 추가 압박을 초래하는 악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