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그린란드를 삼키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시도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흔들고 있다. 무력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협상·관세를 지렛대로 한 압박은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대한 유럽의 신뢰 하락이 달러 자산에 대한 ‘비중 조절(Rebalancing)’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소위 미국과 유럽 간 경제 전쟁이다. 다만 대서양 금융 전쟁이 벌어져도 코스피 5000선을 찍은 한국 증시에는 큰 악재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글로벌 포트폴리오 재편에 따른 단기 충격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한국의 주력 상품인 반도체와 피지컬 AI(인공지능), 방산, K-팝 등은 꾸준하고 강력한 글로벌 수요가 예상돼 기업실적을 뒷받침할 것으로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1일 수요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제56차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에서 특별 연설을 마친 후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1일(현지시각)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설에서 “사람들은 내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고,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군사 행동은 검토하지도 않았다(Not on the table)”고 덧붙였다.
하지만 무력만 배제했을 뿐 다른 수단으로 그린란드를 미국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계속 진행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역사를 통해 다른 많은 영토를 획득했던 것처럼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획득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면서 “안전하지 않은 거대한 섬(그린란드)은 북미의 일부이며 미국이 이를 획득하는 것은 나토에 대한 위협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유럽 지도자들에게 그린란드를 위한 즉각적인 협상을 촉구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재 미국은 덴마크와 맺을 잠재 협상안(Framework)을 만들고 있으며 미군 주둔과 북극 안보 강화를 위한 유럽의 역할 확대 등이 담겼다고 21일 보도했다. 특히 미국은 관세 철회를 대가로 그린란드의 자원개발 권한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현재 작업 중인 협상안이 덴마크에 전달됐을 것”이라며 “매우 환상적”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협상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최근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한 8개 유럽 국가에 대해 2월 1일부터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다보스 연설에서 이를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협상 추이에 따라 다시 관세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도 “유럽이 받아들인다면 이를 높게 평가하겠지만, 거부한다면 대가가 따를 것(You can say no and we will remember)”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증시는 안도했다. 주가는 오르고 금리는 떨어졌다. 치솟던 금과 은 값의 상승세도 멈췄다. 하지만 미국 주식 시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움직임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다. 독일 증시는 오히려 하락했다.
이미 미국과 유럽 간 균열은 되돌릴 수 없으며 전세계적인 달러 자산 재조정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로 촉발된 이른바 ‘셀 아메리카(Sell America)’ 행보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관측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유럽은 8조~10조 달러의 미국 주식과 채권을 보유 중이다. 주가가 크게 하락하거나 금리 많이 오르면 올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의 최대 쟁점인 ‘생활비(Affordability)’ 논란이 커진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21일 다보스에서 지난 18일 도이체방크에서 발간한 ‘그린란드 사태에 따른 유럽의 미국 국채 매도 가능성’ 보고서를 언급했다. 평가절하한 듯 보이지만 신경이 쓰인다는 뜻도 된다. 베센트 장관은 보고서에 대해 “한 애널리스트의 주장을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가짜 언론들이 부풀렸다”며 “도이체방크 최고경영자가 전화해서 회사는 해당 보고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아무리 미국이 미워도 유럽 자금이 당장 달러 자산을 대거 팔면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달러 자산을 덜 사거나 사지 않더라도 미국을 대체할 안전하고 돈이 되는 투자처를 찾은 후의 선택이다. 일본이 변수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최근 중의원을 해산하고 2월 8일 총선을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그러면서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을 공약했다. 세수는 줄고 지출이 늘면 재정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정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40%(국제통화기금 2025년 말 추정치)로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
다카이치 총리의 총선 선언 이후 일본 장기국채 가격은 급락(금리 상승)하고 있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997년 8월 이후 29년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스위스는 물론 독일보다도 더 높아졌다.
일본은 오랜 기간 초 저금리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싼값에 엔화를 빌려 달러로 바꿔 글로벌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확산됐다. 일본 금리가 오르면 조달 비용이 높아져 투자 매력이 줄어든다. 최소 수조 달러 이상으로 그 규모도 정확히 추정이 어려운 엔 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되면 글로벌 자산시장에 치명적일 수 있다. 미국에 투자된 유럽 자금이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철수하지는 않겠지만,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조짐이 뚜렷해지면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선제적인 비중 축소에 나설 가능성은 충분하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 유럽이 방위비 증강과 기술 혁신에 나설 가능성도 커졌다. 큰돈이 필요하다. 미국 등 해외에 투자된 자산을 다시 유럽으로 되돌리려는 정책이 빠르게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1월 23일 오전 코스피 지수가 어제에 이어 장중 5000선을 돌파했다.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 사진=박정훈 기자달러 자산의 매력 축소, 일본과 유럽의 재정지출 확대 등은 모두 금리를 높이는 재료다. 고금리는 증시에 부담이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금리에도 AI가 이끄는 주식 시장, 특히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망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한비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글로벌 매크로 환경은 K자형 회복 구도가 뚜렷한데, 실질적으로는 AI 관련 산업이 성장을 주도하는 구조”라면서 “AI가 글로벌 경제의 핵심 성장 요인으로 자리 잡는 국면이라면, 금리 상승 국면에서도 주식시장이 동반 상승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국제금융센터는 지난 16일 발간한 ‘2026년 한국 주식시장 여건 및 전망’ 자료에서 “반도체 주 중심 실적 개선과 양호한 밸류에이션, 기업가치 제고 등 정책 지원으로 우호적 여건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센터의 분석을 보면 최근 지수 상승으로 코스피의 12개월 후행 주가수익비율(PER)은 2024년말 11.5배에서 2025년 말 17배로 높아졌다. 하지만 올해 이익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돼 12개월 선행으로 따지면 10.5배로 여전히 장기 평균인 10배 수준이다. 미국(S&P500) 21.9배(장기 평균 18.9배), 일본(TOPIXS) 15.5배(장기 평균 13.9배)보다 한참 낮다. 최근 은행예금에서 주식으로의 자금이동이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지정학적 불안에 따른 외국인 자금 이탈이 발생하더라도 충격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
공화당서도 ‘탄핵’ 언급…그린란드 점령 입지 좁아진 트럼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무력 사용을 하지 않기로 한 배경으로 ‘탄핵’이 꼽힌다.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동맹국에 대한 트럼프의 일방적인 무력 사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탄핵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최소 1명 이상의 공화당 상원의원이 “트럼프가 덴마크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다면 탄핵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 1·2기 집권 기간을 통틀어 여당인 공화당에서 ‘탄핵’이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5년 10월 1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규모 트럼프 대통령 반대 시위. 사진=UPI/연합뉴스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시작할 수 있지만 60일 이내에 의회의 승인(철수 유예기간 30일은 별도)을 얻어야 한다. 의회는 대통령의 전쟁 권한을 제한하는 효력을 갖는 결의안(War Powers Resolution·WPR)을 채택할 수 있다. 미국의 예산 편성권은 의회에 있다. WPR을 채택하지 않더라도 예산을 통해 행정부 단독의 군사 행동을 사실상 막을 수 있다. 조약을 통한 영토 편입도 의회를 통과해야 한다. 예산과 조약 체결은 상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그린란드에 대해서는 공화당 내부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알래스카의 공화당 상원의원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하원에서도 트럼프가 그린란드에 무력을 동원할 경우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공화당 의원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론도 트럼프에 불리하다.
다보스 포럼 직전 미국 CN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그린란드를 획득하려는 트럼프의 시도에 찬성한 응답자는 25%에 불과했다. 공화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찬반이 50 대 50으로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