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 물고문 등 3년간 무려 33건 발생…하반신 마비·사망자까지
엄궁동 2인조 사건 전,후에도 경찰의 고문, 폭행, 사건조작 등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출처=부산일보 데이터베이스
지난 5월 8일 재심청구서가 접수된 엄궁동 2인조 사건 관련, 박준영 변호사와 <일요신문>은 추가 취재 및 자료수집 과정에서 만난 사건 관계자와 부산 전직 경찰관 등으로부터 공통된 말을 들었다. 엄궁동 2인조가 구속된 1991년 전‧후로 유사한 사건이 많았으며, 경찰의 고문‧폭행 사건 역시 적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박 변호사와 <일요신문>은 지난해부터 유사사건과 경찰 고문‧폭행 사건 등에 대한 판결문, 수사기록을 일부 입수하기도 했지만 앞서의 증언을 입증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박 변호사가 26년 전 보도됐던 ‘신문 기사’를 전수조사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조사는 1946년 설립된 <부산일보> 사옥에 직접 방문해 공개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진행했다. 대상은 엄궁동 2인조가 주범으로 지목된 살인 사건 발생 시기에 발행된 1990년 1월 1일자부터 1992년 12월 31일자까지, 총 3년 치 신문이다. 이 기간 보도된 엄궁동 2인조 사건과 유사한 2인‧3인조 강도‧살인 사건 등과 경찰의 고문‧폭행 관련 기사는 총 360건으로 조사됐다.
# 경찰 고문‧폭행 사건 더 있었다
엄궁동 2인조의 수사기록을 보면, 이들은 1991년 12월 검찰의 2차 조사 단계에서부터 범행을 전면 부인한다. 앞선 경찰 조사 단계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 두 남자가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다. 이들은 “경찰의 고문과 폭행에 고통스러워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검찰은 수사 경찰들을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했고, 이들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재판에서도 경찰관들은 가혹행위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부도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판결문을 보면 당시 재판부는 고문‧폭행 주장에 대해 “피고인(엄궁동 2인조)이 범행 일체를 자백한 상황에서 경찰이 가혹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올해 초 박 변호사와 만난 앞서의 경찰관들은 “가혹행위와 허위자백 유도, 사건 조작 등은 이 사건(엄궁동 2인조 사건)은 물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부산일보> 보도를 종합해보면, 경찰관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의혹만 제기되고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사건이나 피해를 주장하는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제외하고, 부산 경찰청의 진상조사나 검찰 수사, 재판 과정에서 가혹행위 사실이 드러난 사건들만 다시 추려냈지만 당시 부산 경찰의 고문‧폭행 관련 사건은 매년 수차례 반복되고 있었다.
엄궁동 2인조가 낙동강변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기록된 1990년 한 해에만 총 18건의 경찰 가혹행위 사건이 발생했다. 미성년자 2명을 강도 용의자로 몰아 14시간 동안 감금‧폭행한 사건부터 영아 살해범으로 지목된 용의자에게서 별다른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자, 올가미를 목에 거는 등 가혹행위를 해 허위자백을 받아낸 사건 등이 포함돼 있다.
엄궁동 2인조가 구속된 1991년부터 1992년까지 2년 사이엔 총 15건의 경찰의 가혹행위 사건이 발생한다. 엄궁동 2인조가 주장하고 있는 겨자 섞은 물고문과 폭행, 허위자백 유도는 이 시기에 집중돼 있다. 이 시기 발생한 15건의 사건 가운데에는 사망자도 나왔으며, 척추를 크게 다쳐 하반신과 손가락이 마비된 피해자도 있다.
특히 1992년 8월 4일자 신문에 실린 사건은 엄궁동 2인조가 겪었다고 주장한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보도 내용을 보면, 대구원정소매치기단 주범과 공범으로 경찰에 차례로 검거된 C 씨와 D 씨는 공범관계 인정을 강요받았다. 이들이 서로를 모른다고 하자 경찰은 물고문과 폭행을 했고, 결국 두 남자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했다. 엄궁동 2인조 최인철 씨와 장동익 씨는 앞서의 사건과 같이 각각 주범과 공범으로 구속된 이후 경찰로부터 가혹행위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앞서의 ‘대구원정소매치기단 허위자백 사건’의 발생 시기다. 엄궁동 2인조가 재판에서 “경찰의 고문‧폭행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검찰과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시점에 발생했다. 당시 엄궁동 2인조 수사 경찰관들의 “엄궁동 사건 전에도, 후에도 가혹행위는 없었다”는 주장과 다르다. 또한 공교롭게도 ‘대구원정소매치기단 허위자백 사건’이 발생한 경찰서는 엄궁동 2인조를 ‘성공적으로 검거’한 부산 사하경찰서다.
# 유사범죄도 반복적으로 발생
당시 수사 경찰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점은 또 있다. 엄궁동 2인조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다. 엄궁동 2인조에게 강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던 전직 경찰관은 올해 초 박 변호사와 만나 “두 남자가 검거된 이후 2인조 강도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며 이들이 진범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부산일보> 보도를 보면, 1990년 1월부터 1992년 12월 말까지 발생한 2인조 강도 사건은 100여 건이 넘는다. 수사기록에서 엄궁동 2인조의 주요 범행 수법은 경찰관 사칭이며 대상은 심야 시간 차 안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들이었는데, 앞서의 100여 건 가운데 ‘카데이트’족을 대상으로 한 사건들과 경찰관을 사칭한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사건은 엄궁동 2인조가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이후인 1992년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 범죄와의 전쟁
경찰의 가혹행위와 불안정한 치안의 원인 중 하나는 1991년 8월 1일 부산직할시지방경찰청 개청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게 부산 전‧현직 경찰관들의 증언이다. <일요신문> 취재과정에서 만난 경찰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엄궁동 2인조와 같은 피해자들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산 경찰은 1963년 1월 1일 경상남도경찰국에서 분리‧신설된 이후 30여 년간 부산시경찰국으로 운영돼 왔다. 그러다 1991년 8월 1일 경찰법 제정에 따라 내무부 장관의 보조기관이었던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독립하면서 부산시경찰국은 부산직할시지방경찰청으로 새롭게 개청했다.
새롭게 경찰청이 발족되면서 전국 경찰 간부 300여 명이 승진하거나 자리를 바꿨다. <일요신문>과 만난 복수의 부산 전직 경찰관들은 이를 ‘5공 이후 최대 규모의 경찰 인사’라고 표현했다. 여기에 새로운 보직도 신설되면서 고위 간부 이하 인사 규모는 더욱 컸다.
문제는 이 시기부터 한동안 전국 경찰 수사 부진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요 도시에 지방경찰청이 개청된 1991년 8월부터 1년 뒤인 1992년 8월까지의 신문 보도를 종합해보면, 늘어나는 미해결 사건은 물론 경찰관들의 금품수수, 업무 부조리 등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부산지방경찰청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부산일보>의 1991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보도에서는 경찰수사부진 사건이 급증한 점이 수차례 지적됐다.
이에 대해 한 부산의 전직 경찰관은 “부산지방경찰청 개청 이후 간부들이 늘어나면서 실적경쟁도 심해졌다. 더구나 당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이후라 경쟁은 더 치열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인원보충이나 예산지원이 늦어지면서 오히려 수사가 부실하게 이뤄지거나 미해결 사건들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겼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산의 전직 경찰관은 “위(정부)에서는 수사 부진 여론을 의식한 압박이 들어오고, 현장에선 인원도 예산도 부족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일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무리한 수사가 있었다면 그 시기에 주로 나왔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1991년 9월 3일, 경찰의 허술한 민생치안과 관련한 여론이 들끓자, 경찰청은 수배자 검거가 부진한 전국 경찰서장 41명에 대해 경고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경고 조치 대상에는 당시 부산 사하경찰서장도 포함돼 있었다. 엄궁동 2인조는 그로부터 2개월 뒤에 구속된다.
한편, <부산일보> 보도 전수조사는 2014년 3월, 언론에 대서특필된 ‘북한 보위사 직파간첩’ 사건으로 알려진 홍강철 씨(일요신문 제1293호 간첩과 살인범…‘세상에서 가장 선한 연대’)가 맡았다. 1심과 항소심에서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 받고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홍 씨는, 박준영 변호사를 도와 엄궁동 2인조 사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는 지난 5월부터 <부산일보> 사옥에 처음 방문해 약 한 달 간 3년 치 신문을 모두 확인해 정리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91년 ‘카오디오’에 ‘녹음 기능’ 있었다고? 경찰 정황 끼워넣기 논란 엄궁동 2인조 사건 재심청구서에서 지적된 경찰 조작 정황 중 하나로 다뤄지고 있는 쟁점 중 하나로 ‘카오디오’가 등장한다. ‘엄궁동 부녀자 강간‧살인 사건’에서 피해 여성과 남성이 타고 있던 차량 카오디오에 외부 음성 녹음 기능이 있는지 여부와 파손 상태다. 1991년 12월 피해 남성이 경찰에 진술한 내용을 보면 “피해 차량 카오디오에 녹음기능이 있었다”는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수사 경찰은 1991년 12월 일자가 적히지 않은 수사보고에 “엄궁동 2인조 사건의 주범 최인철 씨가 피해 남성으로부터 카오디오에 녹음기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파손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수사 경찰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피고인들(엄궁동 2인조)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날 피고인 최인철로부터 카오디오 파손 관련 진술을 들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그러나 앞서의 두 수사 경찰의 수사보고 내용 및 증언과 달리, 최 씨 조서 등 수사기록 어디에도 ‘카오디오에 녹음기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파손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사건 발생 당일 작성된 검증조서와 촬영 사진을 보면, 카오디오가 파손된 상태라는 언급도 없으며 사진으로도 파손되지 않은 모습이 확인된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엄궁동 2인조의 자백 외에 별다른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오디오 파손이라는 정황 사실을 끼워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엄궁동 2인조 수사기록에는 카오디오가 파손된 상태라는 언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 엄궁동 2인조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피해 차량을 인수했던 D 씨도 파손 상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D 씨는 앞서의 ‘엄궁동 살인사건’ 피해 여성, 남성과 함께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회사 소유였던 피해 차량을 경찰로부터 인수해 회사로 옮겼다. 지난 5월 14일 박준영 변호사와 만난 D 씨는 차량 조수석 콘솔박스가 열려있었고, 좌석 부분 부분이 삼각, 사각으로 뜯겨져 있던 점을 또렷이 기억했다. D 씨의 증언은 현장검증 당시 촬영된 사진과 정확히 일치한다. D 씨는 “카오디오 파손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카오디오 녹음기능과 관련, 당시 피해 차량에 설치됐던 카오디오를 개발‧생산했던 제조사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제조사 측은 <일요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외부 음성을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은 없었다. 개조 등을 통해 별도로 녹음 기능을 추가할 수도 없었다”며 “수입 제품이나 경쟁사 제품에도 녹음 기능이 있는 카오디오는 없었다”고 말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