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침략으로 사라진 것과 남은 것들
13세기는 모든 아시아 국가가 몽골제국과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1270년. 고려는 7차례의 몽골 침입으로 39년의 긴 싸움 끝에 강화를 맺어 전쟁을 끝냈습니다. 나라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반도를 발판으로 몽골이 일본 정벌을 두 번이나 시도했기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1279년. 중국 남송은 40년간의 길고 긴 싸움 끝에 나라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몽골제국의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국 역사 교과서에 충신이 가장 많은 시기입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287년. 버마 최초의 통일왕조 바간제국이 멸망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세계 불교 중심지 바간은 폐허로 남은 채 지금까지 순례자의 발길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몽골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자,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침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버마왕은 몽골의 약탈을 피해 바간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바간 민가바 거리의 칠기공예 공방. 문양을 수놓고 있다.
대나무를 저민 후 동그란 그릇모양을 만든다.
18세기부터 옛 버마와 이웃나라 중국 사이에는 10년마다 양국이 특산물을 교환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선물기록에 따르면 중국으로 비취, 코끼리, 전통칠기를 보냈습니다. 칠기는 식생활용부터 보석함, 경전보관함까지 생활문화의 중요한 분야를 차지했습니다. 미얀마 전통칠기 융(Yun)은 저민 대나무를 동그랗게 만 틀에 자연물감으로 옻칠을 하고 말린 후 여러 차례의 색감을 덧칠하는 기법으로 만듭니다. 여러 문양은 칼로 파낸 자리에 자연재료로 색감을 내기에 아주 섬세한 작업입니다. 지금은 바간, 삐에, 만달레이, 몽유와 지역에 공방들이 있습니다.
자연재료로 생칠을 하고 말린 후 여러 번 덧칠을 한다.
문양을 만들고 색감을 내는 섬세한 작업이 이어진다.
칠기의 역사는 바간에서 시작됩니다. 버마를 통일한 아노라타왕(Anawrahta)은 1057년 몬(Mon)족의 수도 타톤왕국을 정복합니다. 이때 상좌부 불교와 인도 팔리어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바간을 종교와 문화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많은 승려와 장인들을 데려왔습니다. 그중에는 포로로 잡혀온 타톤왕국의 왕과 공예기술의 장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마을의 특산품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바간 역사의 기록이 멈춘 시기가 너무 길어, 그 명맥을 어떻게 이어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미얀마 50짯 지폐에 그려진 전통 칠기공예.
한편 몽골제국이 가장 긴 전쟁을 치른 중국의 남송. 전쟁 중 몽골의 칸도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항전이었습니다. 나라는 사라졌지만 중국인들이 역사 속에서 ‘충신의 상징’으로 꼽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문천상. 옥중에서 쓴 ‘정기가’를 읽으면 숙연해집니다. 그는 결국 몽골제국이 세운 원나라에 잡혔지만 몽골의 쿠빌라이 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고, 그 재능을 아까워한 쿠빌라이 칸이 처형을 미루고 5년간 설득했습니다. 두 인물이 주고받은 대화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국민들이 그를 존경하기에 반란을 없애기 위해 끝내 문천상을 처형하며 쿠빌라이 칸이 ‘진정한 대장부’라며 애석해 했습니다.
사라진 왕조와 사라진 나라. 불멸일 것 같던 몽골제국도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쓰라린 승리와 패배를 거듭한 탐욕의 역사, 그 뒤안길. 미얀마 50짯 지폐에는 바간의 칠기공예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민가바 거리에서 만난 대나무 칠기들은 아무런 말없이 곱게 앉아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문득 나라의 암흑 속에서 옥중에 앉아 있는 문천상이 그립습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