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가리지 않고 재능기부 “든든한 아내 지원 덕…SK 와이번스 매각 아내가 더 아쉬워 해”
인천 한 카페에서 이만수 전 감독을 만났다. 그는 “50년간 야구로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의 말이다. 헐크, KBO리그 역대 최고 포수, 갓동님(God+감독님) 등의 수식어를 가진 이만수 전 감독은 2014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난 이후 동남아 지역 야구 전파에 힘을 쏟고 있다. ‘야구’라는 단어조차 없던 라오스에서 재능기부를 하며 야구협회를 설립, 대표팀을 결성해 아시안게임에도 참가했다. 최근에는 베트남야구협회 설립에도 힘을 보탰다. 2015년부터 끊임없이 동남아 지역을 오가며 노력한 결과다.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는 이만수 전 감독은 일요신문과 만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나중에 정치인이 될래요” 헐크를 라오스에 잡아둔 학생의 한 마디
지속적인 야구용품 후원, 재능기부 등에 이어 국가대표팀 결성 등으로 라오스와 이만수 전 감독의 인연은 잘 알려져 있다. 시작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했다. 그는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던 시절 지인이 라오스에 와서 야구 재능기부를 해달라고 하더라. 그땐 현장에 있어 바쁠 때니 ‘시간이 나면 가겠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다(웃음). 감독직을 내려놓으니 이제 오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또 연락이 왔다. 뱉어놓은 말이 있어 결국 라오스로 넘어갔다. 그렇게 라오스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라오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인연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야구 환경이 척박한 것은 물론 기후나 음식도 그에겐 생소한 곳이었다.
“라오스어로 ‘야구’라는 단어가 없었다. 1900년대 초 외국인 선교사가 야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해 ‘베쓰볼’이라고 불리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라오스는 야구를 그냥 영어로 ‘베이스볼’이라고 한다(웃음). 개인적으로는 동남아 지역에 처음 가보는 것이었다. 음식도 잘 맞지 않았기에 ‘오래 지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라오스 학생들을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치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처음엔 그저 도와주자는 생각이었다. 길어야 2~3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경제 수준이 높지 않기에 간식을 먹기 위해 야구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학생들에게 한국을 경험하게 한 이후였다.
이 전 감독은 “한국을 다녀온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하루 세 끼를 먹는 것’ 정도로 대답하던 아이들이 저마다 정치인 선생님 사업가 등 꿈을 이야기하더라. ‘정치인이 돼 라오스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 학생들과 나눴던 대화를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꼽았다.
“겉으론 장난스럽게 ‘야구선수 하겠다는 친구는 왜 없느냐’고 했지만(웃음) 정말 뿌듯했다. 그저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목표였던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고 꿈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국과 라오스를 오가며 고생을 했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만수 전 감독의 재능기부는 라오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만수 전 감독의 재능기부는 라오스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언론 등에서 라오스 활동이 부각돼 그렇지 국내에서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는 은퇴 이후 1년에 50여 곳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유명 선수를 배출한 야구 명문보다 작은 규모의 학교나 야구클럽 등을 찾았다. 전국을 직접 다녔기에, 감독직을 내려놓으면서 아내에게 선물 받은 고가 외제차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2년 만에 12만km를 돌아다녔더라. 이제는 비싼 차를 못 타겠더라”며 웃었다.
2015년 ‘야인’이 된 이만수 전 감독은 각지를 다니며 재능기부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다. 그를 찾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마다 공문까지 보냈지만 선뜻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프로구단 감독까지 했던 이 전 감독을 초빙하면 어느 정도 ‘거마비’를 줘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한 지도자가 조심스럽게 ‘금액’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더라. 펄쩍 뛰면서 ‘절대 안 받는다’고 말했다. 내가 KBO리그 원년부터 뛴 ‘원로’ 격이기에(웃음) 일선 지도자들과 연차가 많이 나서 어려워하기도 했다”면서 “그래서 ‘야구장에서만 보자‘고 했다. 학부모, 코치진들과 식사도 따로 했다. 정말 한 푼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쳐주니 나를 찾는 곳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소문은 빨랐다. 전국의 야구팀들이 ‘헐크 모시기’에 나섰다. 이 전 감독은 “한 번 가면 3박 4일은 기본, 일주일 동안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도 했다. 1년에 반은 집 밖에 나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유명 선수, 감독들의 재능기부 활동이 이어지길 바란다. 소규모 학교들은 도움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한다”고도 말했다.
최근에는 재능기부 행진에 제동이 걸렸다.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것. 그는 “강원도 고성, 전남 목포 등 약속이 돼 있는 곳들이 있는데 빨리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다”며 “조용히 남들 모르게 다녀볼까 생각도 했는데 소문은 나게 돼 있다. 괜히 코로나19가 퍼질까 싶어 참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이어지며 그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 전 감독은 “선수 코치 감독 생활 이후 현장을 떠나서도 재능기부 때문에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1년 동안은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수년간 전국을 돌며 건강이 많이 나빠졌는데 많이 회복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몸무게도 15kg 감량 이후 1년 가까이 요요현상 없이 유지되고 있다”며 웃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남은 인생을 재능기부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헐크 재능기부의 원천, 아내
이 전 감독은 SK 사령탑에서 물러난 이후 오랜 기간 재능기부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아내를 첫손에 꼽았다. 그는 “아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프로 감독이 월급을 많이 받는 직업이지만 반대로 돈을 쓸 일도 많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 나온 이후 내가 돈을 적게 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에게 물으니 ‘감독 맡을 때보다 1.5배 쓴다’고 하더라. 전국을 다니며 교통, 숙박, 식사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경 쓰지 말고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하라’고 하더라. 그동안 내가 야구에서 받은 것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기부 활동 초기, 그는 모든 비용을 혼자 부담했다. 그와 함께할 뜻을 밝힌 박현우 코치(롯데 자이언츠 부단장)에게는 ‘월급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면서도 활동 비용은 자신이 부담했다. 이만수 전 감독의 이 같은 활동이 알려지고, 박현우 코치 외 동료들이 ‘헐크파운데이션’이라는 이름의 재단을 만들면서 상황이 나아졌다. 이를 토대로 라오스 야구장 건립 등 대규모 사업도 가능해졌다.
이만수 전 감독은 4억 원이라는 금액을 재단에 내놓기도 했다. 그는 “대구의 한 병원에서 광고 모델을 하며 2억 원을 받아 그대로 재단에 집어넣었다. 내 손에 들어오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아내에게 ‘2억 원을 받게 됐는데 기부를 하면 어떨까’라고 물어봤는데 잠시 고민을 하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이미 기부했다’고 털어놓으니 살짝 섭섭해했다”며 웃었다.
그는 또 피칭머신 업체 광고를 한 이후 피칭머신 27대를 각 학교에 기부했다. 아내 모르게 한 일이었지만 피칭머신을 선물 받은 학교 측이 언론에 알리며 ‘발각’이 됐다. 그는 “잠깐 타박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항상 나를 지지해준다. 다만 ‘그런 거 하기 전에 미리 말을 해달라’고 하더라”며 크게 웃었다.
이만수 전 감독의 아내는 최근 알려진 SK 와이번스 매각 소식을 가장 아쉬워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소식을 먼저 전해준 사람도 아내다. ‘다니던 학교가 사라진 것처럼 서운한 느낌이다’라고 하더라. 나는 현장을 떠나며 프로야구 무대에 대한 마음을 많이 접어뒀다. 아내에게 ‘미련 갖지 말고 섭섭해하지 말자’고 말했다”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는 못하는 듯했다. 이 전 감독은 미국 생활을 하다 SK 수석코치로 부임한 2006년 이래 지금까지 인천에서 살고 있다.
이 전 감독은 인터뷰 내내 “야구로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아내도 자주 하는 말이라고 전했다. 그는 “나와 아내는 신앙인이기에 나눔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선수 은퇴 이후 미국에서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야구 스타들이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그때 많은 것을 느꼈다. 나도 앞으로 최소 20년 정도, 80세가 될 때까지는, 인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재능기부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