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체계 개편 강제 동의 의혹에 공정위 조사 증거인멸 논란…“내부 혁신 먼저” 지적
조선, 해양·플랜트, 에너지, 산업기계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현대중공업그룹은 201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현대중공업을 인적분할해 사업지주회사로 현대중공업지주를 세웠다.
이어 현대중공업은 2019년 한국조선해양(존속법인, 현대중공업그룹 조선 부문 중간지주사)과 현대중공업(신설사업법인) 두 개의 회사로 법인분할했다. 현대중공업지주는 2020년 물적분할을 통해 로봇사업을 영위하는 현대로보틱스를 자회사로 출범시키고 순수지주회사로 전환해 한국조선해양, 현대오일뱅크, 현대일렉트릭, 현대로보틱스, 현대글로벌서비스, 현대건설기계를 지배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국민들에게 가장 눈에 띄는 창업 스토리를 지닌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모래밭이었던 울산 미포만 백사장의 5만 분의 1 지도와 500원짜리 지폐 속 거북선을 보여주고 영국은행에서 자금을 유치해 세계 1위 조선소를 갖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세계 1위 조선소답게 한국조선해양의 자회사인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은 지난해 LNG(액화천연가스)선 255만CGT(선박 건조량 지표인 표준 화물선 환산 톤수), 컨테이너선 251만CGT, 탱커 124만CGT, LPG(액화석유가스)선 121만CGT 등을 수주해 목표액(149억 달러)의 53%를 초과한 228억 달러의 수주실적을 달성했다.
다만 후판값이 급등해 흑자달성엔 실패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증권사 전망치 평균에 따르면 한국조선해양의 지난해 영업손실 추정치는 약 6240억 원이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후판값은 선박 건조 비용의 약 20% 정도를 차지해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권오갑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사업구조 △사고 △기술 △시스템 등의 ‘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그룹이 영위하는 사업의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을 도입해 자동화 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제조업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전했다.
또 환경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업의 역할, 즉 ESG(환경·책임·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고의 혁신’을 언급하며 “임원은 임원답게 자기 역할을 해야 하고 대표이사는 대표이사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사고의 혁신은 리더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인이 해야 할 일에는 엄격해야 하며 적어도 후배 직원이나 동료로부터 그 결과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권오갑 회장의 신년사에 대해 일각에선 ‘내부 혁신’이 먼저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특히 끝이 안 보이는 노사 갈등을 현대중공업의 대표적인 악재로 꼽는다.
최근에도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에선 임금 개편안을 두고 노사 갈등이 불거졌다. 업계와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등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의 과장급 이상 사무직에게 지난 1일부터 바뀐 임금체계를 적용했다. 임금체계 개편의 주요 내용은 △과장·차장·부장(HL3~5) ‘책임’으로 일원화 △월차 폐지, 노사 약정 휴일 축소 통해 기본급 17만 원 인상 △월 20시간 기준 업무관리수당 지급 등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2월 21일 ‘임금체계 개편 관련 대표이사 담화문’을 통해 “이번 개편안은 (12월) 15~16일 직원투표를 통해 과반의 찬성을 얻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현대중공업에 재직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한 직원이 “투표가 아닌 공개 사인”이라고 언급해 파장을 일으켰다.
해당 커뮤니티에는 현대중공업 직원 A 씨가 임금체계 개편 과정에서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정기선 현대중공업 사장에게 이메일을 보낸 사진도 게재했다. A 씨는 정기선 사장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일부 현업부서에선 보상지원팀에서 제시한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며 “중간관리자 없이 동의서를 징구했다가 개인면담을 통해 반대를 찬성으로 바꾸기도 했다. 눈에 띄는 행동이 있을시 인사상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경고한 부서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도크장에서 배를 뚝딱 만들 듯 81%짜리 동의서는 그렇게 뚝딱 만들어졌다.(미포조선 91%)”고 덧붙였다.
일부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에 따르면 사측은 임금체계 장점만 설명하는 영상을 영상안전교육 시간에 튼 것으로도 전해진다. 근로자 B 씨는 “회사가 2주에 한 번씩 근무시간에 시간 내서 TV로 영상안전교육을 하는데 어느 날 일괄적으로 달라진 임금체계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바뀔 것이다’라고 했다”며 “영상에선 달라진 임금체계의 장점만 나열했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관계자는 “지난 12월 30일 서울중앙지법에 1월 1일 자로 시행되는 연봉제 적용 직원 취업규칙과 연봉제 급여세칙의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현대미포조선 노조도 지난 5일 기준 현대중공업지부와 비슷한 내용의 가처분 신청 접수 여부를 고민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설명회, 동의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쳤으며 계획대로 올해부터 새로운 임금체계를 적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강제로 동의하게 하거나 제대로 설명이 없었던 게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이라며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가이드북'에서 근로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던 만큼 이번 현대중공업 임금체계 개편에 절차적 문제는 없었는지 고용노동부에 질의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 내부 혁신이 언급되는 이유는 또 있다. 현대중공업 임직원 3명이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8년 7~8월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하도급법 위반 관련 직권조사 및 고용노동부의 파견법 위반 관련 수사에 대비해 회사 임직원들이 사용하는 PC 102대와 하드디스크 273대를 교체하며 증거를 인멸했다. 공정위 불공정 하도급 현장조사가 시작되자 자료를 조직적으로 은닉한 것.
권오갑 회장이 주장한 ESG 경영과 거리가 먼 행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하도급 갑질뿐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려 한 잘못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ESG 경영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현대중공업이 책임 있는 태도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권오갑 회장에게 변혁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적을 위한 혁신에만 치우쳐 있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조선업은 대표적인 노동집약 산업으로 내부 직원들과 갈등은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관계자는 "기업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오너가 모를 수 없다. 오너들이 인지하고 있거나 오너 지시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며 “권오갑 회장이 윤리경영을 이행하며 리더십 있는 자세로 현대중공업을 이끌어 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공정위 증거인멸 등) 사측 내 사고가 발생했다면 신속히 재발방지책을 내놓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