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맑은샘 부친 홍시범 대표 개최…“순서 깜빡? 뭣이 중헌디!” 전국 맹장 용장 모여 ‘라떼’ 실력 뽐내
신년 첫 아마추어 바둑대회의 타이틀이다. ‘대회 명칭이 뭐 이런가’ 싶었는데 대회를 만든 이가 ‘바둑과 사람’의 홍시범 대표였다. “새해도 됐고 코로나19로 바둑대회가 많이 줄었으니 한번 만들어봤죠. ‘슈퍼 시니어 바둑대회’ 혹은 ‘전설의 멤버’ 등등을 생각하다 ‘우리가 어느새’로 정했습니다.”
대회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시니어 바둑대회다. 그런데 그냥 대회가 아니다. 일단 남남, 혹은 남녀 페어바둑으로 치러지는데 두 사람의 합이 125세 이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60세+65세거나 50세+75세가 짝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125세 이상이 아니면 참가가 불가능하다.
대회 룰도 독특하다. 제한시간은 5분에 20초 피셔방식인데 중간에 작전타임을 준다. 바둑에 웬 작전타임인가 싶었는데 대국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자 홍 대표가 직접 징을 쳐서 작전타임 시간이 됐음을 알린다.
징이 울리면 팀마다 제각각의 모습을 보인다. 대국 중간 아쉬웠던 장면을 서로 얘기하는 팀이 있는가 하면, 어느 팀은 다음 수를 의논하거나 작전을 짜기도 한다. 또 어떤 팀은 담배를 챙겨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가기도 한다.
“작전시간은 딱 4분만 줍니다.”
“이유가?”
“전에 5분을 줬더니 좀 어수선했어요. 4분이 딱 좋습니다.”
문득 홍 대표가 왜 이런 이벤트 대회를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아들이 바둑을 배운 죄지요. 아들 때문에 바둑계로 흘러들어와 20년 넘게 발목이 잡혔죠. 그래도 바둑으로 인해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 연을 맺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죠. 제가 받은 걸 돌려드리는 겁니다.”
홍시범 대표의 아들은 현재 일본 도쿄에서 바둑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홍맑은샘 프로다. 그가 운영하는 ‘홍도장’은 이치리키 료 9단, 시바노 도라마루 9단, 후지사와 리나 5단 등 프로기사 25명을 배출해 일본 최고의 바둑도장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바둑대회 얘기로 돌아와 작전타임 외에 ‘우리가 어느새’는 착수 순서가 헷갈릴 때는 자신의 차례인지 상대나 동료에게 물어봐도 상관없다. 다른 대회 같으면 반칙패를 당한다거나 엄청난 페널티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까짓 것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홍 대표의 말이다.
“아, 나이가 들었는데 어디 예전만 하겠어요. 너무 룰만 따지다보면 야박해서 재미없어요. 수십 년을 같이 전장을 누빈 사이들인데 이젠 묻기도 하고, 확인도 하고 그런 여유도 필요하죠.”
대회에는 16개 팀이 도전장을 던졌다. 그중 가장 연장자는 전주의 양완규 선수다. 1939년생이니까 올해 84세. 1972년생 김종민 선수와 짝을 이뤄 출전했다. 최고령 팀은 1950년생끼리 짝을 이룬 김희중, 임동균 선수다. 올해 73세가 됐으니 둘의 합은 146세다.
이외에도 정인규, 박성균, 박강수, 장시영, 조민수, 심우섭 등 전국의 맹장, 용장들이 오랜만에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팀당 4경기 변형 스위스리그를 치른 끝에 우승은 이학용-노근수 팀이 차지했다. 어떻게 팀을 이뤘냐고 묻자 이학용 선수가 “제가 먼저 같이 하자고 연락했습니다. 노근수 사범이 포석이 정말 좋아요. AI(인공지능) 같다니까. 서로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며 웃는다.
우승팀만큼이나 준우승을 차지한 김희중-임동균 팀도 눈길을 끌었다. 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신년회에서 듣자마자 김희중 선수가 임동균 선수에게 함께 팀을 이뤄보자고 제안해 뭉쳤단다. 임동균 선수의 회고.
“김희중 사범과는 50년이 넘은 친구 사이야. 10대 후반에 만났으니 정말 오래된 사이지. 김 사범은 어릴 때부터 특출나서 이미 그때도 잘 뒀어. 친구 사이지만 나도 많이 바둑을 배웠지. 친구이자 선생 같은 사람이 같이 팀을 이루자니 나야 고마웠지.”
최근 아마추어 바둑의 가장 큰 행사인 내셔널바둑리그에서 시니어 선수들이 올해부터 퇴출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둑 종목의 경우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에서 성격이 비슷한 2개의 대회 즉 내셔널바둑리그와 시도바둑리그를 따로 개최하여 이중 예산이 투입된다는 지적이 나왔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리그를 통합할 수밖에 없다는 게 대한바둑협회의 입장.
하지만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전문체육(엘리트)과 생활체육(동호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와중에 그동안 전문체육(내셔널바둑리그)에서 활약해왔던 시니어 선수들이 퇴출될 수도 있어 시니어 선수들의 반발도 크다. 여기에는 대한바둑협회가 추진하고 있는 디비전리그 사업 등도 맞물려 있어 쉽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협회는 정부 시책에 부합하면서도 시니어 선수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니 이에 대한 기대가 크다. 부디 모두가 만족하는 상생책이 나오길.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