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후보 간 최소 격차, 민주당 후보 역대 최다 득표, 정권교체 10년 주기론 와해…비호감 대선에 끝까지 표심 흔들
#울다가 웃은 당선인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자정이 되기도 전에 당선이 확실시돼,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나와 당선 인사를 했다. 덕분에 방송은 물론, 조간신문들도 일찌감치 당선 확정 뉴스를 띄웠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자정을 넘겨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윤석열 당선인은 개표가 시작된 지 8시간여 만인 3일 10일 새벽 3시 57분에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나와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추운 날씨에 오랫동안 기다린 기자들을 향해 “밤이 아주 길었다”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빨리 나오려 해도 승부가 결정되지 않아 나올 수 없었고, 피 말리는 밤을 보냈다는 토로로 읽혔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론이 훨씬 높다는 결과치가 나왔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의 단일화까지 이뤘지만, 개표 시작과 동시에 이재명 후보에게 뒤처지기 시작해 9일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도 우위는 바뀌지 않았다. “이러다 지는 것 아니냐”는 탄식이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 나왔고 윤 당선인 자신도 몹시 초조해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1, 2위 후보 간 득표율이 역대 최소 격차 신기록을 세웠다. 윤 당선인의 득표율은 48.56%로 이 후보(47.83%)를 불과 0.73%포인트(p, 24만 7077표) 앞섰다. 앞서 기록은 1997년 15대 대선이었다.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40.27%의 득표율로, 38.74%를 얻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1.53%p(39만 557표) 차이로 신승했다. 그때보다 이번 대선이 표차가 15만 표가량 더 적었다.
무효표(30만 7542표)도 15대 대선 때(40만 195표) 이후 25년 만에 가장 많아, 또 하나의 기록을 더했다. 이번 대선의 무효표는 19대 대선 13만 5733표, 18대 대선 12만 6838표와 비교해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특히 무효 투표수가 1, 2위 후보 간 득표차보다도 많다. 윤 당선인 입장에서는 무효표가 많았던 것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단일화가 너무 늦었다는 자책으로도 이어졌다. 투표용지가 인쇄된 시점 이후에 단일화가 이뤄지면서 무효표가 급증했다는 자체 분석이 나온 것이다.
이번 대선은 초박빙이었지만 롤러코스터 개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도 눈길을 끈다. 당초 이 후보가 앞서가다 윤 당선인이 10일 새벽 12시 30분을 지나며 전세를 뒤집었는데, 이후에는 재역전극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 대목에 세워진 또 하나의 기록은 대선 역사에서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지상파 방송3사의 출구조사 정확성이 이번에도 재연됐다는 것이다. 방송3사는 윤 당선인이 48.4%, 이 후보가 47.8%를 받을 것으로 예측했다. 격차는 0.6%p였다. 최종 개표 결과 윤 당선인 48.56%, 이 후보 47.83%. 국민의힘은 출구조사의 정확성을 믿고 초박빙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는 사전투표와 코로나19 격리자 투표 등 투표 참여자의 40%가량이 출구조사에서 제외, 출구조사가 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초접전 상황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결과를 맞춰 주목을 받았다. 국민의힘 선대위 한 핵심 관계자는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유권자를 광범위하게 조사한 출구조사는 전화로 의사를 물어보는 여론조사보다 정확도가 높다. 때문에 사전투표 개표가 끝나고 당일 투표함이 열리면 골든크로스가 이뤄질 것이라고 봤고 재역전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털어놨다.
#웃다 통곡한 이재명
이재명 후보도 다양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우선 이 후보는 역대 대선에 나섰던 모든 민주당 후보 중 최다 득표(1614만 7738표)를 했다. 직전인 19대 대선 문재인 대통령의 득표(1342만 3800표)보다 270만 표나 더 많았다. 이 후보는 여야 통틀어 역대 모든 대선 낙선자 중에서도 최다 득표 기록을 쏘아 올렸다. 불과 24만여 표 차이로 진 초박빙 선거였으니, 이 기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이 후보는 여야 대선 경쟁 구도 속 ‘정권교체 10년 주기론’을 무너뜨린 후보라는 꼬리표도 달게 됐다. 이른바 ‘87년 체제’로 불리는 제6공화국 출범 이후 보수정당과 민주당 계열 정당이 10년 주기로 여야 정권교체를 해왔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1992년 14대 대선에서 승리하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997년 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며 여야 공격과 수비를 교대했고, 2002년 16대 대선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상대로 극적으로 승리, 정권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이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2007년 17대 대선에서 다시 정권교체를 이뤄낸 데 이어, 2012년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접전 끝에 승리하며 정권 재창출을 이뤄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 파면되면서 치러진 19대 대선에서는 ‘촛불민심’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대권에 재도전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정권교체를 해냈다.
‘10년 주기론’대로라면 이번 대선은 정권 재창출 차례였지만, 이번만큼은 국민들이 ‘미워도 다시 한 번’을 허락하지 않았다. 1987년 이후 35년 만에 처음으로 5년 집권 후 물러난 정권이 돼버린 것이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계열의 강세지역이었고,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25개구 구청장 가운데 서초구를 제외하고 모두 싹쓸이를 했을 만큼 최근 수년간 민주당의 텃밭이 돼왔던 서울 민심이 보수정당 쪽으로 돌아선 기록도 이 후보에겐 뼈아픈 대목이다. 윤 당선인은 서울에서 50.56%를 기록, 45.73%에 그친 이 후보를 4.83%p차로 이겼다. 영남이 윤 당선인, 호남이 이 후보로 쏠린 상황에서 서울의 변심은 이 후보에게 치명타였다.
“서울 25개구 가운데 14곳에서 우리가 졌다는 최종 개표 결과가 나왔다. 민주당이 4곳을 빼고 싹쓸이했던 21대 총선과 비교하면 10곳이 넘어간 셈이다. 아파트 값이 많이 올라 부동산 세금 부담이 커진 곳이다. 이 후보는 역대 민주당 대선 후보 중 최다 득표자라는 기록을 냈지만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정권심판론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민주당 한 수도권 현역 의원은 선수가 좋아서 정말 좋은 기록을 냈는데, 선거 구도가 좋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왜 이런 일이?
민주당의 하소연처럼 최종 개표 결과가 윤 당선인에게 기운 것은 ‘정권심판론’이 워낙 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역대 모든 대선의 바로미터는 전국 팔도 사람들이 다양한 구성비로 모여 사는 서울을 보면 알 수 있었는데, 이번 대선에서도 서울에서 만들어진 정권심판론이 제1야당 후보의 승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역대 대선 가운데 가장 적은 표 격차가 나오고, 이로 인해 당선인 확정이 투표 다음날 새벽 늦게 나온 것과 관련해서는 ‘후보자 특성 이론’을 정치권에서 말한다. 비호감 후보가 많았다는 점에서 유권자들이 막판까지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채 표심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다.
사실 국민의힘은 대선 직전 10%p 차로 윤 당선인이 앞서간다는 자체 여론조사까지 받아들고 있었는데, 초박빙 최종 개표 결과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거에는 TV토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지 후보를 결정해놓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이번 대선에서는 토론을 볼 때도 표심이 이동했고 기표할 때까지도 표심이 변동성을 보였다는 뒤늦은 분석을 내놨다.
박근혜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보수정당 지지자들은 능력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에서 윤 당선인은 미덥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보수 표심이 좌충우돌한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이 후보가 과연 민주당 적통이 될 수 있느냐는 의심이 있었다. 각 지지층의 갈등 속에서 표심이 분화했고 변동성이 컸다”고 설명했다.
정권교체 바람이 거세 민주당에 불리한 싸움이라는 전반적 예측 속에서도 초박빙 승부가 펼쳐진 것은 지난 수년간 선거에서 연전연승해온 ‘선거전문가 정당’ 민주당의 실력이 재현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막판 지지층 결집을 이뤄내면서 크게 선전했다는 것이다. 곧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된 국민의힘이 대선 승리에 도취해 머뭇거리다가는, 민주당에게 곧바로 역공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