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올림픽만 보고 뛰어, 목표 이루니 성취감만큼 허탈감 컸다…제주 돌아온 순간 정말 행복”
2022시즌, K리그를 뜨겁게 달군 소식 중 하나는 구자철의 친정 복귀였다. 2010시즌 이후 유럽으로 떠났던 구자철은 12년이 지난 2022시즌 다시 제주 유나이티드의 주황색 유니폼을 입었다. K리그와 분데스리가를 넘나들었던 약 15년간의 프로 생활, A매치 76경기(19득점)를 포함해 연령별 대표까지 100회가 넘는 대표팀 경기 등 수많은 커리어를 쌓아온 구자철이다. 그중에서도 구자철은 자신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로 올림픽 동메달을 꼽는다. 10년이 흐른 지금 구자철은 당시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구자철은 10년 전의 올림픽 메달을 "나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만든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연령별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구자철이 어린 시절부터 품은 꿈이었다. 그는 "박주영, 백지훈 등 형들이 뛰던 청소년 월드컵 대회가 굉장히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백지훈 형이 주장으로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며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꿈은 현실이 됐다. U-19 대표팀부터 본격적인 연령별 대표 생활을 시작했다. 이내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한 홍명보 감독을 만났다. 그는 "홍 감독님을 만나서 광저우 아시안게임이라는 대회에도 참가했고 올림픽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오직 올림픽 메달 획득이라는 목표만을 바라보며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순수한 마음으로 가졌던 꿈이다"라고 덧붙였다.
올림픽을 준비하던 2~3년간 구자철은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스스로도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대회를 앞두고 소속팀에서 출전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자 올림픽을 위해 임대(볼프스부르크→아우크스부르크)를 택할 정도였다.
#가장 강렬한 기억? 올림픽 아닌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준비하는 기간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회 2년 전인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주축 멤버들은 한 차례 좌절을 경험했다. 금메달을 노리고 참가한 대회에서 홍명보호는 동메달을 따내는 데 그쳤다. 선수들의 실망감은 컸다.
"외부에서는 금메달을 낙관했었다. 우리 또한 금메달만이 목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중압감이 컸다. 8강전을 앞두고 미팅을 하는데 눈물을 보이는 선수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선수들도 동감을 했다. 결국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4강에서 졌다.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당시 대회를 경험한 선수들은 이후 벌어진 이란과의 3, 4위전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축구 인생에서의 터닝 포인트로 꼽는다. 당시 의욕을 잃은 듯했던 대표팀은 전반에만 2골을 내줬다. 하지만 후반전, 달라진 모습으로 4골을 몰아넣으며 역전을 거둬 동메달을 따냈다.
"하프타임에 라커룸에서 감독님이 언성을 높이셨다. 특정 선수에게 화를 내신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순히 경기를 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했던 것 같다. 결국 역전을 하면서 '축구가 이런 것이었지, 우리는 이런 팀이었지, 나는 이렇게 축구를 해야 했는데' 등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다가왔다. 다른 경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메시지가 강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구자철은 "무언가에 쫓기면서, 중압감 아래에서는 축구가 즐거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긴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는 "어떻게 그 압박을 이겨내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때 선수들이 받았던 감정이나 느낌은 다시 만들어내기 쉽지 않기에 지금까지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허탈감과 방황
그토록 염원하던 메달을 손에 넣었지만 당시 23세의 구자철은 이겨내기 힘든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다. 생애 가장 큰 목표가 이뤄지고 나자 그다음 단계가 혼란스러웠고 공허감도 들었다.
"3, 4위를 가리는 한일전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나는 가장 슬펐던 사람이다. 또 다른 목표를 가져야 했었는데 내 목표는 올림픽 말고는 없었다.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3년 가까이 올림픽 하나만 보고 살았다.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슬픔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방황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당시를 떠올리며 구자철은 "한동안 조울증 같은 것을 겪기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축구의 경사에 당시 수많은 행사가 이어졌다. 올림픽 대표 멤버들이 만찬을 열기도 했고 갖가지 브랜드, 지자체들이 선수들과 함께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그해 연말 열렸던 '홍명보 자선축구경기' 또한 올림픽 멤버들이 주축이 된 축제였다. 그는 "심리적으로 방황을 하면서도 행사가 열릴 때면 그런 분위기에 취하기도 했다. 좋게 이야기하면 너무나 순수했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겉멋이 들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구자철과 대표팀, 홍명보 감독을 향한 박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2년 뒤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1무 2패라는 결과를 받아들었고 큰 질타가 이어졌다. 구자철은 "올림픽이라는 목표를 이뤘을 때 월드컵이라는 다음 목표가 보였지만 그때는 현실적으로 다가가지 못했었다"라며 "정말 순수하게 축구를 하다가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이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 압박감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라며 많이 흔들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구자철은 "후회는 없다"고 했다. "이렇게 했어야 했다, 저렇게 해야 했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며 "내 삶에서 그런 경험을 하면서 단계적으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월드컵 앞둔 현 대표팀을 바라보는 시각
사상 최초 올림픽 메달을 따낸 당시 대표팀은 대한축구협회의 계획적인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U-20 대표팀 단계에서부터 올림픽을 목표로 홍명보 감독이 각급 대표팀을 순차적으로 맡으며 같은 구성원들로 성장을 이뤄냈다. 올림픽 2년 전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도 21세 이하 멤버들을 주축으로 나섰다.
구자철 역시 이에 대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런 정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아시안게임에 나설 수 있었을까"라며 "아마 홍명보라는 인물이 주는 파워가 그런 정책이 있을 수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현재의 A대표팀과 연결 지었다.
"우리 사회에 기다려주지 않는 문화가 있지 않나.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대표팀의 상황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벤투 감독이 지난 4년을 온전히 이끌어왔다. 자신의 색깔을 꾸준히 어필하고 스타일을 심었다. 이번 월드컵이 큰 기대가 된다. 동메달을 따냈던 올림픽과 같은 결과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팀을 향한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도 꿋꿋하게 믿고 지지해준 축구협회의 선택이 빛을 발할 것으로 생각한다."
#42번 구자철의 현재 목표
그렇게 구자철이 청춘을 바쳐온 대표팀을 떠난 지도 3년이 흘렀다. 자신이 프로 경력을 시작했던 제주로 돌아오며 그가 처음 달았던 등번호 42번을 다시 달았다. 그는 제주 유니폼을 다시 입으며 "꿈을 이뤘다"고 했다.
"언제나 상상하고 고대하던 일이다. 나의 꿈을 이루게 해준 곳이 K리그고 제주다.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돌아오는 순간 정말 행복했다."
커리어 내내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뤄왔던 구자철에게 남은 목표 중 하나는 제주의 우승이다. 그는 "이제까지 마음먹은 것은 거의 이뤘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 제주에서 우승의 문턱을 넘지 못 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물론 욕심은 나지만 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그래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도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며 "나 스스로가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팀원들이 더 즐기면서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했다.
서귀포=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