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로 돈 더 받기보단 1년이라도 빠른 도전 중요…빅리그 투수 상대로 내 실력 통할지 궁금”
이정후의 미국 진출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됐던 시나리오였다. KBO리그 7시즌을 마치고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나가느냐 아니면 8시즌 후 자유계약(FA) 신분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느냐의 문제였다. 이정후의 선택은 포스팅 시스템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실력이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2022시즌의 이정후는 KBO리그 최고의 타자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성적을 올렸다. 142경기에 출전해 타율(0.349) 안타(193개) 타점(113점) 출루율(0.421) 장타율(0.575) 등 타격 5개 부문 1위를 휩쓸었다. 프로 첫해인 2017년부터 타율 0.324에 179안타를 때리면서 입지를 다지더니 단 한 시즌도 침체된 적 없이 꾸준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 결과 5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과 일구회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의 단골 수상자로 주목을 받았다.
이정후를 만나 해외 진출과 관련된 속마음을 들어봤다.
이정후와의 인터뷰는 12월 12일에 진행됐다. 당시만 해도 그는 해외 진출과 관련된 공식 입장을 밝히기 전이었다. 곧 구단을 방문해 자신의 입장을 전할 계획이라고 설명한 그는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해외 진출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포스팅 시스템”이라고 답했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었다. KBO리그는 1군에서 7시즌을 마친 선수에게 해외 진출 기회가 주어진다. 주위에선 한 시즌을 더 보내고 FA 자격으로 미국에 가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 살이라도 어린 나이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운동선수한테 1년은 굉장히 크게 다가온다. 그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잘할 거란 보장도 없고, 부상당할 수도 있다. FA로 더 많은 돈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돈보다 도전이 더 중요하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해서 잘 적응해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다음주 정도 구단에 들어갈 예정인데 그때 내 입장을 공식적으로 말씀드릴 예정이다.”
이정후는 원래 일본 프로야구를 보며 성장했다. 아버지 이종범 코치(LG)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했을 때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롤 모델은 스즈키 이치로였다. 프로 입단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일본 프로야구 진출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본 야구를 많이 보면서 이치로 선수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다 류현진 선배님이 LA 다저스에 진출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그 경기를 시청하게 됐다. 미국으로 마음을 돌린 결정적인 시기는 스무 살 때 히어로즈 입단 후 처음으로 애리조나에서 진행된 스프링캠프에 가 본 이후부터다. 메이저리그 훈련장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스프링캠프를 위해 만들어진 훈련장 시설이 정말 좋더라. 진짜 놀랐다. 그때부터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치로를 직접 볼 기회도 있었다. 2019년 키움이 스프링캠프지로 텍사스 레인저스가 아닌 시애틀 매리너스 훈련장을 사용했을 때다. 당시 매리너스 선수들이 모두 모여 훈련을 시작했고, 다른 필드에 있었던 이정후는 이동하면서 우연히 이치로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팀 훈련을 소화하느라 이치로한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사인도 받고, 같이 사진도 찍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이정후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서라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도쿄올림픽에서 미국대표팀을 상대하고 나서였다. 이정후는 각각 선발투수로 나선 닉 마르티네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조 라이언(미네소타 트윈스) 등을 상대로 멀티히트와 2루타를 기록했다.
“(김)하성이 형과 팀 메이트인 닉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2안타를 치고, 특급 신인으로 꼽히는 조 라이언한테 2루타를 치는 등 미국 투수들한테 괜찮은 성적을 나타냈다. 메이저리그에는 그들보다 더 강한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많다는데 그들을 상대로 내가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들을 매일 상대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정후는 샌디에이고에서 활약 중인 김하성을 보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평소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선후배 사이로 김하성은 메이저리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정후에게 자신의 경험을 담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성이 형이 샌디에이고 입단 첫 해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출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고 일어나서 자신이 뭘 해야 할 줄을 아는데 미국에선 하루하루가 새로웠다고 하더라.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기에 나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들의 연속이 하성이 형을 답답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성이 형이 올 시즌을 독하게 치러냈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샌디에이고와 키움이 비슷하게 ‘가을야구’를 시작했는데 먼저 떨어진 사람이 경기 보러 가기로 약속했었다. 키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바람에 하성이 형이 귀국해선 우리 팀 경기를 보러 야구장을 방문했다.”
김하성은 키움 후배들을 만나 포스트시즌에는 더 열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세리머니도 많이 해서 팀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는 후문이다.
이정후는 김하성이 메이저리그 진출 후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치르는 동안 김하성을 응원하기 위해 샌디에이고 경기를 챙겨봤다. 필라델피아와 맞붙은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애런 놀라의 빼어난 투구에 놀랐고, 월드시리즈에서 6차전에서 필라델피아 호세 알바라도의 4구 싱커를 받아쳐 역전 3점포를 쏘아 올린 휴스턴의 요르단 알바레즈의 타격에 반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메이저리그 팀들 중 이정후가 선호하는 팀이 있을까? 그는 이 질문에 “메이저리그에 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면서 “시합에 많이 나갈 수 있는 팀, 경기에서 이기는 팀에서 뛰고 싶다”고 대답을 정리했다.
이정후에게 2022시즌은 ‘변화’와 ‘적응’이란 키워드로 대변된다. 그는 자신이 신인 때 함께 뛰었던 선배들이 모두 키움을 떠났고,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신인 때 내가 1번 타자였는데 당시 2번부터 9번에서 뛰었던 선배님들이 한 분도 안 계신다. 넥센 히어로즈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게 바로 ‘프로구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큰 책임감을 갖고 시즌을 맞이했다.”
프로에선 숱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의 이정후한테 선배들의 빈자리는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가장 가슴 아팠던 이별이 (서)건창 형과 (박)병호 선배님이었다. 병호 선배님이 KT로의 이적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귀띔을 해주셨는데 그때도 (팀에) 남아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믿고 의지하고 따랐던 선배님들이 모두 팀을 떠나고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박병호가 FA를 통해 KT 입단이 확정됐을 때 이정후는 개인 SNS를 통해 ‘아무 것도 아닌 제가 히어로즈 구단에 입단해 좋은 가르침을 주시고, 좋은 선배의 본보기를 보여준 선배님들께 너무 감사하다’는 글을 올렸다. ‘이적으로 인해 이제 함께 야구를 하지는 못 하지만 20대 초반에 배운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내용도 첨부했다.
선배들의 부재로 인해 1998년생인 이정후는 어느 순간 팀의 베테랑급 선수로 올라섰다. 그는 “나랑 친구인 SSG 박성한은 팀에서 막내인데 키움에선 내가 중고참”이라며 웃는다.
“이전에는 내 야구만 하면 됐다. 야구가 안 될 때 인상도 쓰고, 감정도 표출했는데 선배님들이 안 계시니까 모든 걸 참고 자제하게 되더라. 나를 보고 있는 시선들을 의식하면서 내가 흔들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위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형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추신수는 유튜브 ‘썸타임즈’의 ‘정근우의 야구이슈다’에 출연해 이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정후는 나이를 못 느낄 정도로 성숙하고 어른스럽다. 한국 최고의 타자라는 수식어가 제일 잘 어울리는 선수이고, 야구 실력과 인성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실력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SSG를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면 좋겠다.”
이정후는 11월 17일 열린 KBO 시상식에서 정규시즌 MVP(최우수선수)를 수상했다. 당시 기자단 107표 중 104표(97.2%)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당시 이정후는 이례적인 수상 소감을 들려줬다. “지금껏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왔는데 이제 내 야구 인생은 내 이름으로 살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상 소감은 이정후가 오랫동안 준비한 진심이었다.
“내가 야구를 시작한 이래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 말이 ‘이종범 아들’이었다. 언젠가는 내 입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고 위치에 올라야 했다. 그게 해외 진출 또는 MVP 수상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6년간 꾸준히 성적을 냈고 MVP까지 받았으니 이젠 아버지의 이름을 떼고 이정후 이름으로만 살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아버지 이종범 코치의 반응이 궁금했다. “아빠도 수상 소감이 멋지다고 말씀해주셨다”는 게 이정후의 전언이다.
이정후가 메이저리그 도전을 공식적으로 밝힌 다음 날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인 MLB닷컴은 이정후 사진을 메인 페이지에 띄우고 “아버지가 ‘바람의 아들’인 이종범이고 이정후는 ‘바람의 손자’라고 불린다”며 이정후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기사를 소개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인 송재우 해설위원은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받은 6년 3600만 달러(포스팅비는 2573만 7737달러 33센트)를 크게 상회하는 몸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