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창모 이후 오지환도 다년계약 전망…‘A급 선발 투수 FA’ 등은 예전보다 찾기 어려워져
그 후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어느새 '비FA 다년 계약'은 스토브리그의 주요 트렌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올 시즌 개막 전인 지난 2월 삼성 라이온즈가 '예비 FA'인 외야수 구자욱과 5년 총액 120억 원에 사인하면서 SSG의 뒤를 따랐다. 3월에는 메이저리그(MLB) 생활을 마치고 친정 SSG로 돌아온 투수 김광현이 4년 총액 151억 원에 계약했다. 심지어 이번 스토브리그에선 NC 다이노스와 롯데 자이언츠가 아직 군복무도 해결하지 않은 젊은 선발 투수 구창모와 박세웅을 다년 계약으로 붙잡았다. 다른 구단들도 핵심 주전 선수가 FA 자격을 얻기 전에 먼저 다년 계약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박세웅의 첫 군 미필자 계약
롯데는 포스트시즌이 한창이던 지난 10월 26일 오른손 투수 박세웅과 5년 총액 90억 원에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KBO리그 역대 6번째이자 롯데 구단 최초의 비FA 다년 계약이었다. 90억 원 가운데 연봉 보장액은 70억 원이고, 옵션은 20억 원이다.
박세웅은 2014년 KT 위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 뒤 2015년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2017년 12승 7패, 평균자책점 3.68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뒷받침하면서 마운드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롯데의 영구 결번 레전드인 고(故) 최동원처럼 안경을 쓰고 공을 뿌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안경 에이스'라는 별명을 물려 받기도 했다. 박세웅은 그 후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면서 안정감을 되찾았다. 롯데 구단은 "이번 계약을 통해 매년 규정이닝 투구와 시즌 10승을 기대할 수 있는 우완 정통파 국내 선발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 자평했다.
파격적인 계약이긴 했다. 박세웅은 다른 '예비 FA'들과 달리, 아직 병역을 마치지 못한 미필자라서다. 앞서 비FA 다년 계약을 한 5명은 모두 병역의 의무를 해결한 선수들이었다. 반면 박세웅은 이번 시즌 막바지 국군체육부대(상무) 야구단에 지원해 서류 전형에 합격했지만, 고심 끝에 지원을 철회했다. 내년 9월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면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다. 다만 이번 아시안게임부터는 '만 24세 혹은 3년 차 이하 선수만 출전할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된다. 내년에 28세가 되는 박세웅은 단 세 자리뿐인 와일드카드로 뽑혀야 출전할 수 있다. 어려운 관문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만약 박세웅이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하거나 대회에 출전했다가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면,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해야 한다. 롯데와 박세웅은 5년 계약 기간 내에 입대할 경우 계약 만료를 2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구창모, 예비 FA 아니어도 7년
그 뒤를 이은 NC의 다년 계약은 더 파격적이었다. NC는 지난 17일 팀 주축 투수인 왼손 투수 구창모와 최대 7년 계약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구창모는 박세웅처럼 병역 미필자일 뿐만 아니라 첫 FA 자격 획득에 필요한 8시즌 중 5시즌만 채운 상황이다. 아직 '예비 FA'도 아닌 20대 중반 선수와의 대규모 장기 계약. 팀 프랜차이즈 스타를 잡기 위한 상징적 '입도선매'였다. 지난해 말 팀의 간판스타였던 FA 외야수 나성범을 KIA 타이거즈로 보내고 충격에 빠졌던 NC는 지난 11월 내부 FA 내야수 박민우와 5+3년 계약을 한 데 이어 구창모까지 비FA 최장 기간 계약으로 묶으면서 '프랜차이즈 스타 집중 단속'에 나선 모양새다.
계약 조건은 구창모가 언제 FA 자격을 얻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구창모는 2023년과 2024년 1군 등록일수 각각 145일을 채우고 국제대회 포상 포인트 35점을 추가하면 2024시즌 후 FA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NC는 2023년부터 계약 기간 6년에 연봉 90억 원, 인센티브 35억 원 등 총액 125억 원을 준다. 만약 구창모가 2024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지 못하면, NC는 2023년부터 계약 기간 6+1년에 보장 연봉 88억 원, 인센티브 44억 원(7년 차 계약 실행시 금액 포함) 등 최대 132억 원을 지급한다. 박세웅과 마찬가지로, 구창모 역시 계약기간 내 입대하면 군 복무기간만큼 계약 만료를 유예하게 된다.
구창모의 FA 획득 시기는 사실상 2023년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아시안게임 성적에 달렸다. KBO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보상과 동기 부여를 위한 포인트 제도를 운영하는데, 1포인트는 FA 자격 획득에 필요한 1군 등록일수 1일로 인정받는다. 내년 3월 열리는 WBC에서는 참가 포인트 10점, 8강 10점, 4강 10점, 준우승 10점, 우승 20점 등 최대 60점을 받을 수 있다. 또 아시안게임에서는 참가 포인트 10점, 우승 15점 등 최대 25점을 얻는다. 구창모가 WBC에 출전하고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돼 금메달을 따면, FA 기간 단축에 필요한 35점을 한꺼번에 확보하고 병역 대체복무 혜택까지 받게 된다는 의미다. 물론 구창모도 박세웅처럼 '아시안게임 와일드카드'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내년 시즌 리그 정상급 기량을 꾸준히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다.
구창모는 2015년 2차 1라운드(전체 3순위)로 NC 지명을 받은 뒤 팀의 토종 에이스급 투수로 성장했다. 2019년 구단 역대 왼손 선발 투수 최초로 10승 고지를 밟았고, 2020년에는 9승 무패에 평균자책점 1.74로 활약하면서 NC의 통합 우승에 힘을 보탰다. 다만 지난해 전완부(팔꿈치와 손목 사이) 수술을 받는 등 부상이 잦아 데뷔 후 한 번도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NC 구단은 "구단 최초의 비FA 다년 계약을 통해 핵심 선발 투수의 선제 확보, 선수의 동기부여, 선발 투수진의 안정화를 꾀했다. 중장기적인 선수단 전력 구성 계획을 실행하고자 이뤄진 계약"이라며 "특히 FA 자격 획득까지 2시즌 이상 남아 있는 구창모와의 장기 계약은 KBO리그 첫 사례다. 장기간 동행을 희망하는 구단과 선수의 생각이 일치해 결실을 봤다"고 설명했다.
#다음 타자는 LG 오지환?
박세웅과 구창모에서 끝이 아니다. LG 트윈스 오지환도 머지 않아 비FA 다년 계약 릴레이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 차명석 LG 단장이 이미 "오지환과 다년 계약을 추진할 생각"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오지환은 LG 내야의 핵심 전력이자 KBO리그 대표 유격수 중 하나다. 2009년 LG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해 이듬해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고, 13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치명적인 수비 실책이 잦았던 입단 초기와 달리, 최근 수년간 공·수·주 모두 안정감이 돋보이는 유격수로 자리매김했다. 수비 범위가 넓고 어깨가 강해 까다로운 타구도 어렵지 않게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올해는 142경기에서 개인 한 시즌 최다인 홈런 25개를 때려내고 87타점, 20도루를 해내 데뷔 후 첫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80%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 속에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품에 안았다.
이런 오지환이 내년 시즌을 끝으로 두 번째 FA 자격을 얻는다. 그는 2019년 한 차례 FA 권리를 행사해 4년 총액 40억 원에 LG와 사인했다. 자동으로 B등급이 되는 터라 타 구단 입장에선 오지환 영입 시 보상금과 보상선수 유출 부담도 크게 줄었다. 내야의 야전 사령관을 필요로 하는 구단들이 거액의 돈 보따리를 들고 달려들 가능성이 크다. LG 입장에선 그 가능성을 일찌감치 차단하고 싶다. 차 단장은 "새해 1월쯤 오지환 측을 만나 다년 계약을 논의할 계획이다. 가능하면 스프링캠프 출발 전에 계약을 완료하려고 한다"며 "계약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직 1년 남은 FA 계약을 파기하고 바로 새 계약을 해도 되고, 현재의 4년 계약을 준수한 뒤 2024년부터 실행되는 새 계약을 해도 된다. 여러 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4년 전보다 더 '금값'이 된 오지환의 계약 기간과 규모도 관심거리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총액이 커지는 건 당연지사. 야구 관계자들은 대부분 "오지환과의 다년 계약이라면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총액 100억 원을 넘기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금의 오지환과 비슷한 나이에 6년 총액 106억 원 계약을 했던 SSG 내야수 최정의 계약 조건이 협상의 기준점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LG는 이미 강속구 마무리 투수 고우석에게도 구창모의 계약을 뛰어 넘는 역대 최장 기간, 최고 금액으로 비FA 장기 계약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고우석은 "FA 자격을 얻으면 메이저리그(MLB)에 도전하고 싶다"며 구단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2017년 입단한 고우석은 2년 뒤 FA가 된다.
#'입도선매'의 명과 암
1년 사이 이렇게 갑자기 비FA 다년계약이 활성화한 이유는 뭘까. 한 구단 단장은 'FA 시장의 과열'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FA 협상은 경험하면 할수록 어렵다. 이번 겨울에도 이 정도로 과열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상상을 초월했다"며 "일찍 선수를 단속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몸값이 더 올라갈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것 같다. 시장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총액 100억 원 이상 계약이 쏟아지는 FA 영입전에 참전했다 패퇴하느니, '독점 협상'을 할 수 있는 비FA 선수를 내부에서 선점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장기 계약의 위험 부담은 따르지만, 소속팀이 그 선수의 몸 상태와 성향, 발전 가능성 등을 다른 어떤 구단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계약 기간과 금액을 산정할 때 유리한 요소다.
또 다른 구단 단장은 "예전보다 대형 FA의 이적이 잦아지면서 선수가 시장에 나가기 전에 일찍 잡으려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FA 시장은 유독 프랜차이즈 스타의 이적이 잦았다. 데뷔 후 줄곧 한 팀에만 몸담았던 나성범·손아섭(롯데→NC)·박병호(키움 히어로즈→KT)·박해민(삼성→LG) 등은 이전 소속구단 팬들에게 유독 큰 사랑을 받은 스타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시장 논리에 따라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팬들은 '원 클럽맨'이 사라지는 시대에 큰 상실감과 충격을 호소했고, 구단들에게는 팀 역사의 근간이 될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돈' 때문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FA를 앞둔 선수들 역시 실력과 운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미래의 시장 가치에 기대를 걸기보다 안락한 소속팀의 '특별 대우'에 화답하는 쪽을 택하기 시작했다.
다만 앞으로 FA 시장에 '특급 매물'이 사라질 거라는 우려도 공존한다. 전력을 단기간에 가장 확실하게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이 외부 FA 영입인데, 눈여겨 보던 대어급 선수들에게 채 손을 뻗기도 전에 문이 닫혀 버리기 때문이다. FA 시장의 과열은 식힐 수 있지만, 구단들 입장에선 트레이드를 비롯한 대안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가뜩이나 귀한 'A급 선발 투수 FA'는 예전보다 더 찾기 어려워졌다. 올해 시장에 나왔어야 할 선발 요원 박종훈과 문승원은 앞으로 SSG에서 4년 더 뛰어야 하고, 20대 선발 투수 중 선두권을 형성하던 박세웅과 구창모 역시 향후 수년간 자의로 팀으로 옮길 가능성이 사라졌다.
당장 이번 스토브리그에 풀린 투수 FA 중 풀 타임 선발 투수는 키움 출신인 정찬헌 한 명뿐인데 아직 소속팀을 찾지 못했다. 선발과 중간을 오가던 스윙맨 중에선 이태양(SSG→한화 이글스)이 4년 25억 원, 이재학(NC 잔류)이 2+1년 총액 9억 원에 사인했을 뿐, 키움에서 FA로 풀린 한현희 역시 미계약 상태로 남아 있다.
내년 시즌 후 FA 자격 취득이 예상되는 투수 역시 임찬규, 함덕주(이상 LG), 김재윤, 주권(이상 KT), 심창민(NC), 오승환(삼성), 김강률(두산), 장민재(한화) 등이 전부다. 전문 불펜 요원으로 활약한 투수가 많고, 선발을 경험한 선수 중에선 당장 팀의 전력을 눈에 띄게 끌어 올려줄 만한 A급 자원이 보이지 않는다. 2024시즌이 끝나야 고영표, 엄상백(KT), 최원태(키움), 임기영(KIA) 등 검증된 선발 요원들이 FA 자격을 얻는데, 이들 중 일찌감치 다년 계약을 해버리는 선수가 또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