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 코인 앞세워 ‘급성장’ 수조 원대 자산가로…테라·루나 급락 사기 혐의 도주 약 1년 만에 검거
#화려한 이력의 청년 사업가
1991년생인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엘리트 청년 사업가’였다. 대원외고를 졸업한 뒤 미국 실리콘밸리 인재의 산실로 불리는 스탠퍼드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대원외고에서도 평범하지 않았다. 재학 시절 ‘하빈저(Harbinger)’라는 특목고 영자신문을 만들어 해외명문대 입시정보 공유 플랫폼으로 발전시켰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학생토론대회에 나가 비영어권 최우수 발표자에게 주는 ‘베스트 EFL 스피커’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실리콘밸리에 자리를 잡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근무기간이 각각 3개월가량으로 짧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이후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5년에 애니파이(와이파이 공유서비스)를 창업했다. 2018년엔 신현성 전 차이코퍼레이션 총괄대표와 손잡고 블록체인을 활용한 결제시스템을 이커머스(전자상거래) 플랫폼에 제공하는 글로벌 블록체인 핀테크 기업 테라폼랩스를 설립했다. 테라는 ‘땅 또는 지구’라는 뜻이다. 땅처럼 안정적인 가치를 가지겠다는 뜻을 담았다.
권 대표는 테라폼랩스를 만들게 된 과정에 대해 과거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2016년 분산 네트워크를 연구하다 코인 ‘토끼굴’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격 변동이 크지 않도록 설계한 암호화폐 테라와 루나를 내놨다.
테라폼랩스에서 만든 테라는 가격변동이 없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라는 게 특징이다. 그보다 앞서 개발된 암호화폐들의 경우 가격 변동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화폐의 역할을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미국 달러나 유로화 등 법정화폐와 일대일로 가치가 고정돼 있기 때문에 기축통화 역할을 할 수 있다.
권도형 대표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루나도 유통했다. 루나와 테라는 공급량을 연동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가치를 유지한다고 홍보했다. 테라 가격이 1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루나를 팔아 테라를 사들이고, 반대의 경우엔 테라로 루나를 사들여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가격 방어’를 한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테라는 이더리움에 이어 2번째로 큰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 플랫폼으로 부상했다. 디파이는 은행 등 중앙 금융 중개자에 의존하지 않고 블록체인 기반의 계약을 활용하는 금융 형태다.
덕분에 테라와 연동돼 있는 루나의 가격은 급등했다. 2021년 초만 해도 개당 1000원도 되지 않던 루나 코인은 지난해 4월 코인원, 업비트 등 디지털 자산 거래소에서 개당 15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했다. 15배 이상 오른 것인데, 암호화폐 가치가 한때 전체 코인 중 10위를 기록했다. 자연스레 설립자인 권 대표의 보유 루나 코인 등 디지털 자산의 가치도 급등했다. 수조 원대의 자산가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암호화폐 업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암호화폐 업계에서는 ‘한국판 일론 머스크’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암호화폐로 주목받는 인물이 된 그는 국내외 언론과는 접촉을 피하면서도 ‘루나틱’이라고 불리는 투자자들과는 SNS로 소통했다. 거친 표현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도 일론 머스크라고 불리는 이유가 됐다. 2021년 7월 영국의 한 경제학자가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 모델의 실패 가능성을 지적하자 권 대표는 “난 가난한 사람과 토론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권 대표의 존재감은 커졌다.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를 유지하고 위험에 담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100억 달러 규모의 비트코인 준비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 말부터 10억 달러(약 1조 2200억 원) 넘게 비트코인을 직접 사들인 것. 하지만 2022년 들어 가상자산 가격이 내리면서 테라와 루나의 가치도 덩달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칙적으로는 가격이 지켜져야 하지만, 급등했던 루나 가격이 급락하면서 패닉셀(공황매도)이 나타났다.
같은 시기, 권 대표는 보유 코인들을 처분했다. 이미 지난해 4월 한국 법인을 해산하고 싱가포르로 출국한 상태였던 권도형 대표는 20억 달러 상당의 테라를 매도했다. 5월 루나 가격은 며칠 사이에 개당 8만 원에서 0.02원 수준으로 99% 넘게 폭락했다. 시가총액 50조 원이 증발했고 피해자는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50조 원 넘는 피해 남기고 숨어버린 권도형
정확한 추정 피해금액은 52조 원 수준. 암호화폐 테라와 루나 시총 400억 달러를 합친 것이다. 테라와 루나 가격 급락으로 대규모 패닉셀이 발생, 암호화폐 헤지펀드 스리애로우스캐피털(3AC), 코인 중개·대부업체 보이저 디지털, 거대 가상화폐 거래소 FTX 등이 연쇄 파산하기도 했다.
그사이 권 대표는 미국과 한국의 검찰 수사를 피해 해외 도피를 이어갔다. 검찰도 사건을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합수단)에 1호 사건으로 배당하고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합수단은 권 대표 검거를 위해 노력했는데 자칫 권 대표의 해외 체류가 더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공소시효를 정지했다.
해외이동을 묶기 위한 시도도 했다. 외교부를 통해 여권 무효화 조치를 한 뒤, 지난해 9월에는 인터폴과 공조해 권 대표에 대한 적색수배령을 정식 발령했다. 적색수배는 최고 등급의 수배로 범죄 행위와 관련돼 체포영장이 발부된 자에 대한 범죄인 인도 목적으로 발행된다. 하지만 당초 싱가포르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권 대표는 이후 세르비아 등으로 옮겨 도피를 이어갔다.
결국 3월 23일 몬테네그로에서 권 대표가 검거됐다. 권 대표는 세르비아에서 두바이로 이동하기 위해 몬테네그로에서 전용기를 탔다가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세르비아에서 머물렀던 것은 동유럽 국가 중 암호화폐 사용 및 채굴이 활성화돼 있는 점, 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나라인 점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또는 한국’ 중 한국 희망할 가능성
권 대표가 체포됐지만, 한국 송환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을 넘어야 한다. 일단 권 대표는 미국이나 한국으로의 송환을 늦추기 위해, 몬테네그로에서 재판을 다 받겠다는 입장이다. 권 대표는 검거되면서 여러 개의 여권을 소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불법 출입국 혐의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외신 등에 따르면 필립 아지치 몬테네그로 내무장관은 “조사를 통해 위조된 벨기에 여권, 다른 이름으로 돼 있는 한국 여권 등을 찾아냈다”고 밝혔는데, 현재 몬테네그로 법원은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구금 기간을 연장한 상태다. 권 대표는 최장 30일 동안 이곳 구치소에 구금될 예정이다. 아지치 장관이 얘기한 것처럼 ‘몬테네그로에서 위조 여권 소지로 구속됨에 따라 타국으로 송환 전에 몬테네그로에서 징역살이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몬테네그로 고등법원에서 미국이나 한국 측의 송환 요청을 받아들여 불법 입국으로 추방할 경우,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변수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 검찰은 권 대표의 신병을 원한다는 의사를 몬네테그로에 밝혔다고 한다. 미국 뉴욕 검찰은 권 대표를 증권 사기, 통신망을 이용한 사기, 상품사기, 시세조종 공모 등 총 8개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지난 2월 권 대표를 증권사기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마르코 코박 몬테네그로 법무장관은 “고등법원에서 권도형이 어느 나라로 갈지 결정할 것”이라며 “범죄의 비중과 사기 장소, 기소 요청 국가들이 많은 것과 국적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의지는 상당하다. 미국 내 피해를 입은 투자자가 많은 것을 강조하며 미국으로의 송환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암호화폐에 대해 ‘증권’이라고 판단, 시세조종 행위 등에 엄단하는 기준을 확보한 상황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권 대표 등이 테라와 달러화의 일대일 교환 비율을 유지한다고 광고하는 행위가 투자자를 속인 것으로 보고 있다. 테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시세를 조작했다는 게 미국 당국의 판단이다. 미국은 증권 범죄의 경우 처벌 기준이 강하다. 추징금만 수십조 원, 징역도 100년 넘게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올 정도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 암호화폐가 ‘증권’이라는 기준을 정립하지 못했다. 증권 성격이 있다고 볼 경우 금융당국이 책임을 져야 할 부분들이 생기는 탓에 판단이 늦어졌다. 금융감독원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유통 중인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단을 지원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설사 권 대표가 한국으로 송환되더라도 법원에서 테라나 루나를 증권으로 판단하지 않을 경우 시세조종 행위 등은 처벌 불가하다. 시세조종이 인정되더라도 징역형이 10~20년 안팎일 가능성이 높다.
금융범죄 수사 경험이 많은 검찰 출신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증권 범죄에 대한 처벌이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주가조작 사건의 경우 사건 규모마다 다르지만 초범이라고 하면 징역 3~5년을 받는 게 전부”라며 “권 대표도 이런 구조를 이해한다면 한국으로 송환되고 싶어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제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고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권 대표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한국 피해자들의 투자금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미국이나 한국 모두 권 대표의 신병 확보에 혈안이 된 것은 추징금을 통해 피해를 조금이라도 회복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권 대표가 해외 도피 과정에서 새로운 법인을 설립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눈길을 끌기도 했다. 3월 27일(현지시간) 암호화폐 전문 인터넷매체 디엘뉴스(DLNews)는 권 대표가 지난해 10월 12일 세르비아에서 회사 설립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10월 12일이면 한국 검찰 요청으로 인터폴 적색수배가 나온 지 3주 정도 지난 시점이다. 권도형의 한국 여권으로 설립한 이 법인은 컨설팅업으로 등록돼 있었고 자본금은 우리 돈 1200원 정도였다.
권 대표가 적색수배 과정에서 새로운 법인을 설립한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범죄 수익 세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세르비아는 유럽에서도 암호화폐 투자가 활발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