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행위 원천 차단 속 한·중 각각 4명씩 8강행…“신진서 존재감 대단, 중국 선수들이 피하려 해”
한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지난해 결승에 올랐던 딩하오 9단과 양딩신 9단이 16강에서 탈락했지만 커제 9단, 미위팅 9단, 구쯔하오 9단, 왕싱하오 8단이 8강에 올라 두터운 선수층을 과시했다. 이에 맞서는 한국은 신진서 9단을 비롯해 변상일 9단, 안성준 9단, 한승주 9단이 8강에 올라 중국에 맞선다.
16강전이 끝나고 곧장 이어진 대진추첨 결과 8강전은 신진서-구쯔하오, 변상일-왕싱하오, 안성준-미위팅, 한승주-커제가 4강 진출권을 놓고 다투게 됐다.
#신진서 “부정행위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
가장 관심을 모은 판은 가장 인공지능(AI)에 근접한 실력을 가져 ‘신(申)공지능’과 ‘헌(軒)공지능’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신진서와 리쉬안하오의 대결이었다.
둘은 지난 연말 제14회 춘란배 준결승에서 맞붙어 당시 예상을 깨고 리쉬안하오가 압승을 거두면서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양딩신이 리쉬안하오를 향해 부정행위 의혹을 제기했고, 중국기원은 양딩신에게 6개월 출전 정지 처분을 내리는 등 논란이 계속돼왔다.
대국장 입구에 금속 탐지기를 설치해 발바닥까지 검사하고, 화장실 앞에도 고정 전담요원을 배치해 삼엄한 보안 속에 시작된 16강전에서 신진서는 리쉬안하오에게 164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이날 승리로 신진서는 24회와 26회 대회에 이어 세 번째 LG배 우승 전망을 밝게 했다. 리쉬안하오와의 상대전적도 2승 1패로 우위에 서게 됐다.
대국을 끝낸 신진서는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내용으로 이겨 기쁘다. 중반까지 팽팽하다고 봤는데 상대가 형세판단을 잘못했는지 무리하는 바람에 쉽게 풀렸다”고 소감을 말했다.
“상대의 부정행위 논란이 신경 쓰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신경은 쓰였다. 상대가 자리를 비울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부정행위)는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신진서 외에 안성준 9단과 한승주 9단의 분전이 돋보였다. 국내랭킹7위 안성준은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인 중국 양딩신 9단을 꺾었다. 양딩신은 23회 LG배 우승자이고 지난해 LG배 준결승에서는 신진서를 꺾은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이번 대회 한국 선수단 중 맏형 안성준에게 발목을 잡혔다.
국내랭킹 12위 한승주 9단은 디펜딩 챔피언 딩하오 9단을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LG배 본선에 처음 출전한 한승주에게는 두 번째 세계대회 8강 진입이다. 한승주는 “국내대회보다 국제기전 성적이 더 좋은 것 같다”고 묻자 “사실 속기보다 장고(長考) 대국을 선호하는데 사람들이 속기파인 줄 잘못 알고 있다”면서 “시간이 많은 대국이 편한데 딩하오 9단과의 대국은 그동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세력 위주의 바둑으로 가져간 것이 먹힌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이 밖에 랭킹3위 변상일 9단은 일본 대표 위정치 8단을 제치고 8강에 안착했다. 변상일의 LG배 최고 성적은 25회 때의 4강이다.
#중국에서는 19세 왕싱하오 8단 눈에 띄어
목진석 국가대표팀 감독은 “란커배에서 박건호 7단이 4강에 진입했고 LG배에서는 안성준 9단과 한승주 9단이 전기 결승 진출자들인 양딩신과 딩하오를 꺾은 것은 무척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까지 한국은 중국에 비해 층이 엷은 게 약점으로 지적되곤 했는데 박건호, 안성준, 한승주 같은 중견 기사들이 힘을 내준다면 향후 중국과의 수적 경쟁에서 대등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함께 출전했던 랭킹2위 박정환 9단은 중국바둑의 미래라는 2004년생 왕싱하오 8단에게 패했으며 신민준 9단과 김정현 8단은 각각 중국의 커제 9단과 미위팅 9단에게 석패, 8강 진입에 실패했다.
이로써 오는 12월 11일 열리는 8강전 대진은 신진서-구쯔하오(6:4). 변상일-왕싱하오(0:2). 안성준-미위팅(1:1), 한승주-커제(0:0, 괄호 안은 상대전적)로 짜였다.
이틀간 현장에서 LG배를 지켜본 최규병 9단은 “확실히 신진서 9단의 존재감이 대단한 것 같다. 대진추첨 현장에서 4명의 중국 기사들이 신진서 9단과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중국 기사들 중에서는 왕싱하오 8단이 눈에 띈다. 아직 어려서 세계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한번 우승을 경험하면 기세를 타서 순식간에 정상권에 올라설 수 있다고 본다. 기재가 커제 9단급이라는 말도 들리고, 그보다 훨씬 낫다고도 하니 요주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이번 LG배 24강전과 16강전을 정리했다.
(주)LG가 후원하는 제28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의 우승상금은 3억 원, 준우승상금은 1억 원이다. 본선 제한시간은 각자 3시간, 40초 초읽기 5회가 주어진다. 27회가 진행되는 동안 나라별로 한국 12회, 중국 12회, 일본 2회, 대만 1회 우승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