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통신사에 심사의무 부여는 책임 전가”…모호한 규정 탓 검찰 대규모 정보 수집 지적
이번 재판은 통신사가 수사기관에 고객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근거와 절차 등도 일부 드러나 관심을 모았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관련법과 규정 곳곳에 모호한 문구들이 적지 않았다. 검찰이 자의적 해석을 토대로 개인정보를 대거 수집해온 정황도 파악됐다. 이는 법원도 우려를 드러낸 지점이다.
#영장 없는 통신조회, 수사 신속성 때문?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민사8단독 이유빈 판사는 1월 22일 "통신사가 법이 정한 절차·형식적 요건을 심사해 수사기관에 고객 개인정보를 넘겼다면 이는 이용자 법익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이용자 권익을 명백히 침해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통신사는 검찰에 통신이용자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번 재판은 SK텔레콤(SKT) 이용자 조용래 씨(56)의 소송 제기로 시작됐다. 그는 서울중앙지검의 2023년 10월, 2023년 11월, 2024년 1월 3차례 통신조회로 주민등록번호·전화번호·주소 등이 검찰에 넘어갔다. 조 씨는 "통신사가 검찰 요구에 응해야 할 법적 의무가 없음에도, 개인정보를 넘겨 법익을 침해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판사는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법원, 검사 또는 수사관서는 국가 안전보장과 위해 방지 등을 목적으로 한 정보 수집을 위해 통신 이용자 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며 "정보를 넘긴 통신사의 위법을 입증하려면 통신사가 개별 사안의 구체 내용을 살펴 제공 여부를 심사해야 할 의무 규정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하지만 전기통신사업법에 이 같은 의무는 없다"면서 "현실적으로도 통신사가 수사기관에 개인정보를 넘김으로써 기본권 침해 등 피해 법익과 사안의 중대성 등을 실질적으로 심사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오히려 "통신사가 이를 심사할 경우 혐의사실 누설 등 사생활 침해 야기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는 특히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조회는 법원 영장 없이 가능하게 돼 있는데, 이는 수사상 신속과 다른 범죄 예방 등을 위해 다른 기관이 수사에 협조하도록 하려는 목적"이라며 "따라서 통신사 등에 정보제공 여부에 대한 실질적 심사의무를 부과하는 조치는 입법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이 같은 구조에서 검찰 등 수사기관이 권한을 남용해 기본권 등이 부당하게 침해될 가능성은 있다"며 "그렇지만 수사기관의 권한 남용 통제는 국가나 해당 수사기관을 대상으로 직접 이뤄져야 하는 게 원칙으로, 통신사에 심사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국가와 수사기관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와 다름없다"고도 했다.
조 씨는 항소할 계획이다. 그는 "통신사가 기업으로서 법적 의무나 강제 규정이 있는 사항만 이행한다는 게 과연 올바른지 의문"이라며 "정보 유출에 관한 통신사 측 통지도 듣지 못한 데다, 수사기관만의 편의 때문에 국민 법익을 해칠 수 있다는 판결은 일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은 '수사기관 통신조회가 영장 없이 가능한 이유는 수사 신속성 등 때문'으로 규정했단 점에서도 주목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2024년 10월 30일 수사기관의 통신조회를 가능하도록 한 전기통신사업법 83조3항 등이 헌법상 영장주의에 반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다.
국회에서도 법 개정 시도에 나섰다. 검찰 출신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4년 9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해 현재 계류 중이다. 개정안은 수사기관의 통신조회 역시 '법원 영장'을 받도록 하고, 통신제한조치·가입자정보 및 통신자료 제공에 관한 적법성 심사를 청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도록 한 게 뼈대다.
#'두루뭉술' 요청, '필요최소' 자의적 해석
이번 소송은 통신사가 검찰에 이용자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과정도 일부 확인돼 눈길을 끌었다. 일요신문은 SKT가 법원에 제출한 변론·답변서 등을 확보했다. 이에 따르면 SKT는 '통신비밀'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GR(Goverment Relationship)팀을 두고 있다. 수사기관에 고객 개인정보를 넘겨도 되는지 적법성 등을 심사하는 역할이다.
SKT 측은 "GR팀이 (검찰 등으로부터) 통신이용자정보 제공 요청을 받으면, 요청자 신분과 요청사유 및 가입자와 연관성, 필요한 자료 범위 등이 적법하게 작성됐는지 내부 심사를 거쳐 제공 여부를 판단한다"며 "통신이용자정보를 제공한 뒤에는 이를 협조대장에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적법성 심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7년 만든 '통신비밀 업무 처리지침' 준수 여부를 살피는 절차다. 이 지침은 수사기관이 △문서 접수번호 △수신처 △요청사유 △해당 이용자와 연관성 △필요한 자료 범위 △요청자 △회신정보 등만 기재해 요청하면, 통신사가 고객 정보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과기부는 해당 지침에서 '요청사유'와 '해당 이용자와 연관성' 항목은 작성 예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요청사유는 "ex)강도사건으로 지명수배 중인 피의자 검거 위한 수사 목적", 이용자와 연관성은 "ex)○○○(사건번호) 피의자(또는 참고인·피해자)가 사용 중인 전화번호에 대한 통신자료 필요" 식으로 기재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서울중앙지검은 '요청사유'에 "○○○(사건번호)수사를 위해 필요함", '이용자와의 연관성'에는 "사건관계인 특정을 위해"라고만 썼다. 과기부 지침에 정면 위배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 요건만으로 수사기관과 통신사가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구조는 다소 허술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과기부 지침은 "하나의 통신자료제공요청서를 통해 요청할 수 있는 조회 대상 건수는 '필요최소한'으로 제한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의 2024년 1월 통신조회만 3176명에 달했다. 검찰이든 통신사든 과기부 지침의 '필요최소한'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에 이같이 무분별한 조회·제공이 가능했단 지적이다.
이에 대해 SKT 측은 법원에 "필요최소한 의무는 수사기관이 지켜야 할 사항"이라며 "통신사로서는 수사기관이 이를 준수했는지 확인할 능력이 없다"고 항변했다. 또 "통신사는 수사 내용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통신이용자가 피의자, 피조사자, 피수사자에 해당하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다"고도 강조했다.
서울중앙지검은 2024년 1월 SKT에 조 씨 개인정보를 요청하며 '3개월 통지 유예' '증거인멸, 도주, 증인 위협 등 공정한 사법절차 진행 방해 우려가 있는 경우'라고도 썼다. 사건 피의자와 통신이용자 가운데 어느 쪽에 도주 등 우려가 있는지 뜻을 알 수 없는 표현이지만, 조 씨 개인정보는 그대로 검찰에 넘겨졌다.
이에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일요신문에 "요청서에 적힌 도주 등 우려 대상자는 사건 피의자와 통신이용자 등 모두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문구"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필요최소 범위를 측정하는 매뉴얼이나 방침 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검찰이 수사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국회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제공받은 통신이용자 정보는 약 2552만 건으로, 한 해 평균 510만 건으로 집계됐다. 전화번호 수 기준으로는 2022년 433만 9000건에서 2023년 463만여 건으로 약 29만 건이 증가했다. 이 중 검찰 증가분만 17만 3000건에 달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