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삶’이 된 사람들의 실존 이야기…“범모에게서 배우로만 살아야 하는 내 자신 읽어내”

“범모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평생 제지공장에서 일을 해 온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그려내면 좋을지 고민하다 아무래도 약간 ‘오타쿠’ 같은 느낌의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도달했죠. 그래서 외모나 콘셉트도 그런 느낌을 갖고 있어요. 첫 등장이 노출 신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느냐는 말씀들을 해주시는데 꼭 필요한 장면이어서 크게 부담되진 않았어요. 오히려 원래 콘티보다 줄인 거라 더 수월했죠. 원래는 벗고, 돌아서서, 욕실까지 들어가야 했거든요(웃음).
만수가 재취업을 위해 제거대상으로 삼은 세 명의 라이벌들은 모두 만수와 한두 가지씩 공통점을 공유하는 그의 ‘분신’들이다. 이 가운데 범모는 재취업마저 실패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을 경우 어떤 결말을 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만수의 가장 ‘실패한 미래’이자 ‘최악의 미래’로 해석되기도 한다.
늘 술에 절어 있어 제대로 된 밥벌이도 못하던 가장은 결국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이에 데굴데굴 구르며 절망하면서도 한심한 제 처지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배신을 삶 안에 받아들인다. 이렇게 비참한 현실을 관객들은 만수와 마찬가지로 멀리에서 마치 무대를 보듯 바라보게 되는데 이성민은 이 신을 스크린으로 보고 나서 “역시 박찬욱 감독”이라며 감탄했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성민이 느낀 박찬욱 감독의 첫인상은 “면도칼 같은 디렉션을 주는 감독”이었다. 배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주목하고, 나중에 완성된 화면을 볼 때서야 ‘아’라고 감탄할 수 있게 만드는, 날카롭게 찌르는 디렉션을 촬영하는 내내 느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간 ‘거장 박찬욱’이라는 이름표 아래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들이 모두 오해였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저는 박찬욱 감독님의 작업 스타일이 어떤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배우를 집어넣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워낙 앵글 안에 인물들과 미술, 소품이 꽉 짜여 넣어진 것처럼 존재하다 보니 작업도 같이해 본 적 없으면서 제가 오해한 거죠. 실제로는 전혀 아니시더라고요. 배우의 창의력을 존중해 주시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조율해 가시는 분이었어요. 현장에서 저도 그런 감독님의 디렉션을 이해하려고 굉장히 집중했던 기억이 나요.”
매 촬영이 집중과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이성민을 긴장하게 만든 신은 역시 ‘고추잠자리’였다. 범모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집까지 찾아온 만수, 그리고 이를 말리려다 의도한 듯 아닌 듯 아리송한 살인에 휘말리는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 분)까지 얽혀드는 이 신은 실제 관객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상 깊고 웃음 터지는 신으로 꼽히기도 했다. 가수 조용필의 명곡 ‘고추잠자리’를 배경으로 등장인물 세 명이 콩트처럼 연기하는 이 신을 촬영하면서 이성민은 “조금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이성민이 “역시 박찬욱 감독”이라고 감탄했던 것 이상으로 관객들은 “역시 이성민”을 외치며 작품의 여운을 곱씹었다. 어떤 역을 맡든 출연 분량의 곱절을 넘어선 깊은 인상과 존재감을 주는 배우인 만큼, 이번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이성민과 박찬욱이 어떤 시너지를 보일지 기대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터다. 실제로도 범모의 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이성민의 연기는 관객들의 예상치를 가뿐히 넘어서며 명실상부 ‘믿보배’의 저력을 재차 실감케 했다. 이제까지 대중들이 그에게 향해온 기대를 단 한번도 배신하지 않았던 이성민은 이 같은 신뢰를 쌓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로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처럼 직업이 배우인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다쳐서 이 일을 영원히 못하게 되면, 이제까지 해 온 게 이거밖에 없는 난 뭘 해야 하지?’ 이런 생각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범모도 굉장히 잘 이해됐죠. 범모처럼 배우가 연기를 못하게 된다는 건 단순히 직업을 잃은 게 아니에요. 이건 인간의 실존 문제고, 나의 ‘살아있음’에 대한 문제인 거죠. 그래서 그런지 어떻게 해서든 건강하고, 사고 안 나고, 다치지 않게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이 드니까 더 크게 드는 것 같아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 게 이 일뿐이고 어느 순간부터 이 직업은 제 삶이 됐으니까요. 그러니 만약에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도 이쪽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