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B 최다 안타·500홈런 금자탑 세우고 KBO 태동기에도 힘 보태…은퇴 뒤 해설·논객으로 영향력 이어가

#장애, 원폭, 가난 딛고 성장
장훈 해설위원은 재일교포라는 남다른 배경을 지닌 데다 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친 야구 스타다. 이에 그의 이야기는 선수 생활 이전 시기 또한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다. 1940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기에 장 해설위원의 인생사는 각종 출판물과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는 재일교포 2세로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던 시기, 화상을 입었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오른손에 장애가 생겼다. 일부 손가락은 심하게 구부러졌고 일부 손가락은 달라붙었다. 자연스레 악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오른손잡이였던 그는 야구에 입문하면서 좌투좌타로 활약하게 된다.
이듬해(1945년) 거주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폭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3km 이내)에서 거주해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인근의 야산 덕에 큰 피해는 면했다. 다만 당시 학교에 다니던 누나는 화를 피하지 못해 사망했다.
비슷한 시기에는 아버지마저 별세했다. 홀어머니가 남은 3남매를 키워야 했던 환경에서 장 해설위원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지는 그가 프로야구 선수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애, 비극, 가난과 같은 험난한 조건은 그가 향후 최고의 야구 선수로 성장하면서 더 많은 팬들을 매료시킨 배경이 됐다. 학생 선수로서의 성장 과정에서도 그의 '별난' 일화들이 전해진다. 호전적인 성향에 폭력 사건에 휘말리기도 해 그의 친형은 동생이 야쿠자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했다고 한다. 학생 시절 히로시마 지역에서 '주먹'으로 유명했다는 후문도 존재한다.

키 181cm의 당시로서는 큰 체구를 앞세워 야구 유망주로 성장한 그는 1959년 프로 입문과 동시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직후 당시 도쿄를 연고로 하던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115안타 13홈런 57타점 타율 0.275의 기록으로 신인왕을 받았다.
승승장구가 이어졌다. 2년 차에는 첫 3할 타율에 진입했고 3년 차에는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다. 4년 차인 1962년에는 팀이 퍼시픽리그 1위에 올랐고 재팬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했다. 장 해설위원은 MVP(퍼시픽리그)로 선정되며 성과를 인정받았다. 17년간 한 팀에서 활약한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롯데 오리온즈를 거치며 리그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다.
장훈 해설위원은 NPB에서 활약한 23시즌간 갖가지 기록을 남겼다. 통산 3085안타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다 안타 기록이다. 504홈런 319도루로 장타와 주루 플레이에도 능했다. 3000안타, 500홈런, 300도루를 모두 달성한 인물은 NPB에서 장 해설위원이 유일하다.
그의 이름은 한국 야구에도 남았다. KBO리그의 태동기부터 2005년까지 KBO 총재 특별 보좌관직을 맡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명부, 김일융 등 NPB에서 활약하던 재일교포 선수들의 KBO리그행을 주선하기도 했다.
'국민타자' 이승엽 현 요미우리 타격코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다수의 한국 스타들이 NPB로 향했으나 유독 이승엽 코치에게 애정을 갖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별세 소식을 접한 이승엽 코치는 "좋은 기억밖에 없다"며 그를 추모했다.
#유니폼 벗고도 이어진 영향력
장 해설위원이 여타 야구 스타와 달랐던 점은 은퇴 이후의 행보다. 동갑내기 오 사다하루, 같은 재일교포이자 절친한 후배 고 백인천 전 감독과 달리 야구 지도자의 길을 걷지 않았다. TV와 라디오 등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시사 프로그램의 스포츠 논객으로 장기간 활동했다.
은퇴 직후부터 해설위원 활동이 시작됐다. 올스타전, 재팬시리즈 등 주요 경기 중계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스포츠 전문 일간지를 통해 평론가로 팬들과 스킨십을 지속했다.
장훈 해설위원은 스포츠 논객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일요일 아침 일본 지상파 방송(TBS) 생방송 시사 프로그램에 20년 이상 고정 출연해 논평을 했다. 야구 외에 다양한 스포츠 종목에 대해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해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80세 이상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에서도 비교적 높은 인지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생애에 빛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해설위원, 논객 활동에서 보인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스포츠계 후배들과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일본 선수 다르빗슈 유는 장 해설위원의 논평 코너 폐지를 희망하는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
말년의 발언은 국내에서 논란을 불렀다. 2024년 일본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으로 귀화했음을 밝혔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져왔던 그의 행보를 아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어 한국 야구로부터 홀대를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과거 올스타전에 초청됐고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 등 한국 야구계가 예우한 사례도 있어 공감을 받지 못했다. 이외에도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한국이 근대 국가가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장훈 해설위원은 당대 최고의 야구 스타, 인기 논객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지속적으로 야구계 목소리를 내면서 때로는 박수를 받았고, 때로는 반발을 불렀다.
분명한 것은 지워지기 어려운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선수로 남긴 3085개의 안타, 굴곡 많은 삶, 은퇴 이후의 행보는 오랜 기간 한일 양국 야구사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