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은 기본, 이러다 총선 망칠라” vs “태극기도 당이 품어야 할 자산”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장에서 당대표 후보 세 사람이 승리를 다짐하고 있다.
전체 당원 숫자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지만 조직적인 투표가 가능하고 강한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다. 태극기 당원 유입으로 한국당 지도부 시각이 왜곡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다.
지난 2월 18일 열린 대구경북 전당대회 합동연설회는 태극기 당원 유입으로 달라진 한국당 내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대구경북은 한국당 책임당원 32만 명 가운데 9만 4000명이 있어 전당대회 승부처로 꼽히는 지역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에 따르면 지난 2월 15~17일 실시한 한국당 차기 당대표 적합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황교안 후보(50.6%)다(응답자 중 한국당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이번 조사는 전국 19살 이상 성인 남녀 116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으며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는 ±2.9%P다).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김진태 후보 측이 압도하고 있었다. 김 후보는 5·18유공자 명단 공개와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주장하는 등 극우성향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김 후보 지지자들은 태극기를 온몸에 두르거나 군복을 입고 현장에 나왔다. 연설회장 입구에서는 김 후보가 주장한 5·18유공자 명단 공개를 지지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 김정은 지령설’을 주장하는 지지자도 있었다. 김 후보자 지지자 중 상당수가 태극기집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었다.
다른 후보 지지자들은 이들에게 압도돼 기를 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김 후보 지지자들은 다른 후보 연설 때 고성을 지르거나, 김진태 후보 지지 피켓을 들어 방해했다. 이에 항의하던 다른 후보 지지자와 다투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김진태 후보 얼굴이 들어간 풍선이 연설회장을 뒤덮었다.
이들에게 김진태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한 지지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해줄 사람은 김 후보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지지하게 됐다. 황교안은 대통령권한대행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됐을 때)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박심(박 전 대통령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일부 후보들은 이런 박심을 얻기 위해 명함이나 현수막에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정치이력을 강조해 표기하기도 했다.
또 다른 태극기부대 출신 인사는 “언론들이 우리를 극우라고 하는데 좀 억울하다. 이렇게 평화적인 극우도 있나. 민주당은 김경수 무죄라면서 대놓고 판결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나. 우리는 왜 탄핵이 잘못됐다고 말하면 안 되냐”고 따졌다.
한 한국당 관계자는 “태극기 당원은 사실 새롭게 등장한 분들이 아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알던 당원분도 그동안 태극기 집회를 나가셨다고 하더라. 원래 온순한 분이셨는데 김진태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 분들이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된 후) 악만 남아서 그렇게 변한 거다”라고 했다.
태극기 당원들을 의식한 탓인지 후보들 연설도 과격양상을 띠었다. 한 청년최고위원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을 탄핵시켜야 한다”면서 “저 딴 게 무슨 대통령이냐”고 발언했다. 현장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다.
또 다른 청년최고위원 후보도 “대통령에게 불복하면 안 되냐”면서 최고위원이 되면 문재인 정부와 강하게 싸우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5·18망언 논란에 연루되었던 김순례 최고위원 후보는 등장만으로도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반면 태극기부대 출신 당원들을 겨냥해 “우리가 무슨 대한애국당이냐”고 비판했던 조대원 최고위원 후보가 등장하자 곳곳에서 욕설이 들렸다. 조 후보가 광주 문제(5·18 망언 논란)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일부 당원들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집에 가 XX야!’ 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후보자 관계자는 태극기부대 당원들이 유입된 영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현장 분위기를 봐라.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겠나. 후보들이 센 발언을 안 할 수가 없다”면서 “그 분들 뿐만 아니라 일반 당원들도 문재인 정부와 협치할 인물보다 강하게 싸워줄 인물을 원하더라. 당원들이 원하니 후보들은 맞춰갈 수밖에 없다. 이번 전당대회는 누가 더 강한 전투력을 가진 후보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고 했다.
김진태 후보 지지자들이 5.18유공자 명단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연설회 막바지에 드디어 태극기부대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김진태 후보가 등장했다. 김 후보가 등장하자 연설회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아이돌 가수 콘서트에 온 듯했다. 환호하던 지지자들은 김 후보 연설이 끝나자 다음 후보 연설이 남았음에도 ‘집에 가자’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한 당원은 “보수가 품격이 있어야지! 이렇게 행동해서 다음 총선 이길 수 있겠냐!”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한국당 관계자는 “요즘 당을 보면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역대 전국단위선거 결과를 보면 영남 인사들이 지도부에 많이 입성했을 때 지고, 수도권 인사들이 지도부에 많이 입성했을 때 이기는 경향이 있더라. 아무래도 영남 인사들은 민심에 둔감하고 수도권 인사들은 민심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태극기 당원 지지를 얻은 후보들이 대거 지도부에 입성하면 우리 당이 민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중도층을 잡으려면 탄핵 사태와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을 출당까지 시킨 거 아닌가. 이제 와서 후보들이 박 전 대통령은 죄가 없다고 하면 중도층이 다 떠난다”면서 “문 대통령을 ‘저 딴 게 무슨 대통령’이라고 언급한 발언이 연설회장에서는 환호를 받았지만 언론에선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지 않나. 지도부나 후보들이 연설회장 여론이 전체 여론이라고 착각할까봐 걱정 된다”고 했다.
실제로 연설회에서 김진태 후보는 “가는 데마다 김진태를 외친다. 이게 당심이고, 이게 민심 아니겠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한 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김진태 의원이 당 대표 출정식을 할 때 어마어마하게 모인 사람들 숫자를 보고 다른 의원들이 놀랐다고 하더라. 정치인 중에 그런 조직이 안 부러운 사람이 있겠나”라며 은연중에 의원들이 태극기부대 당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물론 당내에선 태극기부대 당원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한 전직 한국당 의원은 “박근혜 탄핵은 잘못됐다는 발언이 극우발언인가. 엄연한 팩트 아닌가”라며 “태극기부대 열기는 일부 욕설부분만 빼면 순기능을 하고 있다. 보수정당 전당대회가 동원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나. 미북회담을 압도해 정치 이슈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당은 왁자지껄한 전당대회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앞서의 한국당 관계자는 “선거의 여왕이라 불린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중도층 표를 얻으려고 대선 때 경제민주화를 내세우지 않았나. 중도층 표를 얻지 않고 우리가 재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시 집권당이 되려면 김병준 비대위원장 같은 (중도 성향) 인물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당장 이기겠다고 태극기 입맛에 맞는 말만 쏟아내는 전당대회를 치르고 나면 다음 총선 때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