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에 다시 재판 받는 2인조…재심 결정일 이례적으로 소회 밝힌 재판부, 공판검사도 “대신 사과”
재심은 경찰과 검찰 수사, 세 번의 재판 끝에 나온 판결을 전부 뒤집는 일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정부기관이 재심을 ‘권고’한 과거사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는 일은 드물다. 한국 사법 역사를 통틀어도 아직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낙동강변 2인조가 그 좁은 문을 열었다.
‘낙동강변 2인조’ 장동익 씨와 최인철 씨는 1990년 1월 낙동강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1993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1년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모범수로 감형 받아 2013년 출소한 이들은 2016년 5월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 1년 뒤인 2017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2019년 4월,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낙동강변 2인조가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발표했고 부산고법 형사1부는 이 발표를 근거로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 절차에 착수했다.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는 1월 6일 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사진=문상현 기자
#과거사위 결론의 역설
재심 개시를 결정한 당일, 재판부는 법정에서 이례적으로 입장과 소회를 밝혔다. 약 1시간을 할애해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느낀 부담감과 고민의 깊이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장동익, 최인철 씨와 그들의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고려하면서 재판에 임했다”고 하면서도 “실체적 진실을 찾는 데 한계가 없지 않았다”고 했다.
‘과거사위 결론’이 고민의 근본 원인이었다. 과거사위 발표는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리를 열게 한 이유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재판부가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됐다.
과거사위는 2019년 4월 17일, 낙동강변 살인사건에 대해 ‘고문에 따른 허위자백’ 등을 모두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성적 의미’의 권고사항까지 발표했다. 과거사위가 공권력의 주체인 법무부의 산하 조직이며, 발표 내용의 근거는 현직 검사가 포함된 진상조사단의 조사였던 만큼 그 의미는 적지 않았다. 재판이 과거사위 발표 내용대로 진행되면 재심 개시 여부 결정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과거사위 결론에 비중을 두기 어려운 이유는 더 많았다. 재판부는 검토 결과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심을 권고했던 것처럼 ‘특별재심사유’가 별도로 규정된 특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과거사위 발표 자체에 적어도 재심을 열 수 있는 조건인 ‘확정판결에 준할 정도의 높은 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 역시 없었다고도 했다.
또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개시 여부 심리에 참여한 공판 검사는 증거조사 등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도, 다른 재심 사건(이춘재 8차 사건)에서 검찰이 보인 입장(이춘재 8차 사건을 직접 수사한 수원지검은 재심을 해야 한다고 밝힘)과는 달리 “과거사위 발표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재판부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확정 판결이 내려지는 과정에서도 가혹행위 주장이 나왔지만 모두 배척됐던 만큼 현재의 재판부가 얼마만큼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회의가 없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박준영 변호사(왼쪽)는 재심 결정이 내려진 이후 기자들과 만나 “재판부가 재심 개시 결정과 함께 재심 청구인에 대한 사과, 이번 사건의 의미, 수사기록의 보존방식의 문제점 등을 언급하고 그 개선책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사진=문상현 기자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요즘 현재 학계와 법조계에서도 재심 관련 논쟁이 뜨겁다. 형사소송법이 재심 대상을 엄격하게 규정할 뿐 아니라 대법원의 법리 해석 또한 까다롭기 때문이다. 재심을 확대하면 사실상 제4심을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법적 안정성 우선’ 주장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재판의 원칙을 재심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인권 우선’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
결국 재판부는 과거사위 결론을 중심으로 심리하는 대신 법정에서 직접 재심 사유를 가리기로 하고 심리를 진행해왔다고 밝혔다. 과거사위 결론에 기대지 않고 직접 판단을 내리는, 결코 작지 않은 부담을 스스로 짊어졌던 셈이다. 객관적 정황이 충분히 뒷받침되면 재심을 개시하고, 주관적으로 상당한 의심이 있지만 증명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경우엔 입법적 조치를 촉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앞서의 두 가지 상반된 주장 가운데 ‘인권 우선’에 가까운 판단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재판부는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를 지난 2019년 5월부터 총 6차례 열었다. 통상 재심 개시를 위한 심리는 서면으로 이뤄지지만 이번 재판부는 검찰과 재심청구인, 변호인을 법정에 불러 직접 심문했고 과거 수사 경찰관들과 대검 진상조사단 소속 현직 검사 등을 증인석에 세웠다. 앞서 진행된 다른 재심 사건들의 재판과 견줘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판부는 심문을 마친 결과, 재심 사유가 명백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낙동강변 2인조가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번 심리 과정에서 다뤄진 고문과 가혹행위 외에 다른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내용이 상당하다고 했다. 조직적인 공권력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상당한 의심이 든다는 점을 강조했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이 같은 인권침해가 발생한 경우 재심청구인들이 직접 입증해야 하고, 기록이 폐기되면 입증할 방법은 더욱 어려워지는 만큼 관련 내용에 입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도 언급했다.
장동익, 최인철 씨는 재심 개시 결정 고지일이 정해진 지난해 12월 23일부터 1월 6일까지 초조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사진=문상현 기자
# 늦어진 응답, 그리고 사과
아무도 2인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의 고문과 폭행을 견딜 수 없어 허위자백을 했다고 몇 번이나 소리치고 읍소했지만 그저 반성 없이 뒤늦게 말을 바꾼 ‘질 나쁜’ 살인범으로 볼 뿐이었다. 검사도, 판사도 “경찰이 그럴 리 없다”고 했다. 28년이 지나 두 남자가 다시 법정에 서서 말했다. 21년 5개월의 옥살이를 했던 그들은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외쳤다. 이번엔 답이 돌아왔다. 재판부는 재심청구인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법부의 일원인 우리 재판부는 이제야 재심 개시 결정으로 응답하게 됐습니다. 재심청구인들과 모든 가족들에게 늦어진 응답에 대해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 재판부는 각기 법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이 사건의 여러 의미를 가슴에 깊이 새기겠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주문을 낭독합니다. 재심 대상 판결에 대한 재심을 개시한다.”
재판부는 주문을 낭독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했다. 김문관 부장판사는 묵례에 대해 “재심청구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드리는 사과의 예로 받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검찰의 항고가 없으면 재심 개시 결정이 확정된다. 항고를 하면 대법원 판단을 다시 받아야 한다. 재심 본안 재판을 기다리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검찰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공판검사는 재판부가 법정을 떠난 뒤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있던 장동익, 최인철 씨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