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대책 요구에 준법감시위 출범…엑스파일 사건, 비자금 사건 후 쇄신안 결국 공염불
10년 전인 2010년 2월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한 말이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사상 초유의 ‘원포인트 사면(1인 사면)’을 받은 직후였다. 하지만 이 회장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연이은 비리 의혹과 후속 대책으로 내놓은 쇄신안, 준법 다짐 등이 현재까지도 반복되면서 이 회장의 이 같은 발언이 무색해지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 비자금 사건 ‘원포인트 사면’을 받은 직후 2010년 2월 열린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MBC 뉴스 화면 캡처
# 파기환송심 숙제에 준법감시위원회 설립으로 답한 이재용
삼성그룹은 최근 외부인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된 그룹 감시기구인 준법감시위원회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그룹 내 뇌물·부패행위와 계열사 간 내부거래, 노동탄압 등 위법행위뿐만 아니라 대주주 승계 과정의 불법성까지 독립적으로 들여다보는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준법감시위 위원장에는 대법관 출신 김지형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를 내정했다. 김지형 위원장 외에 대검찰청 차장 출신 봉욱 변호사, 권태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고계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총장, 심인숙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와 삼성 내부인사 이인용 사회공헌업무 총괄고문 등 총 7명으로 구성됐다.
삼성의 이번 준법감시위 발족은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낸 숙제에 대한 답이다. 앞서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 첫 기일에서 이 부회장에게 훈계성 당부를 하며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준법감시위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준법감시위의 법적 실체와 권한이 불명확하고, 내부정보에 접근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된 활동이 가능하겠느냐는 것. 결국 이 부회장 실형을 면하기 위한 ‘면피용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이에 대해 김지형 위원장은 “준법감시위는 삼성 이사회에 속하지 않고 외부의 독립적인 상설기구로 설치한다. 총수나 최고 경영진의 법 위반 사안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조사하고 조치하겠다”며 “이재용 부회장을 직접 만나 이 같은 위원회의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았다”고 강조했다.
# ‘삼성 엑스파일 사건’ 삼지모 성과 없이 해체
삼성그룹의 준법감시기구 설립 및 쇄신안 발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삼성 오너일가가 연루된 비리 의혹으로 사회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쇄신안을 통해 국면 전환을 꾀했다.
첫 쇄신안은 2006년 2월에 발표됐다. 당시는 ‘안기부 삼성 엑스파일 사건’ 직후였다.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삼성이 현직 검사들에 정기적으로 떡값을 줬다”고 폭로한 것. 파장이 커지자 삼성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8000억 원 사회 헌납, 그룹 컨트롤타워 구조조정본부 축소 등의 내용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준법감시위와 비슷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 구성도 당시 쇄신안에 포함됐다. 당시 삼지모에는 삼성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던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 최열 환경재단 대표 등 시민사회 인사들이 참여했다. 삼지모는 이학수 당시 부회장과 윤종용 부회장 등 그룹 최고경영자들과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첫 쇄신안 이후 삼성은 변하지 않았다. 축소된 구조조정본부는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꿔 부활했다. 준법감시 역할을 기대한 삼지모 역시 5~6번의 모임만을 진행한 채 2년 만에 해체됐다.
# ‘삼성 비자금 사건’ 이 회장 퇴진, 2년도 안 돼 복귀
그 와중에 2007년 10월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이 회장의 지시로 비자금을 조성, 임직원 명의의 차명주식 형태로 숨겼다”고 폭로하며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삼성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해 조준웅 특별검사 중심으로 특검 수사가 진행됐다. 당시 특검팀은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을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소환조사했다.
그러자 삼성은 특검수사 결과 발표 닷새 뒤인 2008년 4월 22일 두 번째 쇄신안을 꺼내들었다. 이건희 회장을 포함해 이학수 부회장 등 고위 임원들이 일선에서 퇴진하고, 전략기획실을 해체한다고 밝혔다. 또한 특검에서 드러난 차명계좌 실명화 및 헌납, 사외이사 투명화 등 10개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삼성의 두 번째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전략기획실은 다시 ‘미래전략실’로 간판만 바꾸고 다시 부활했고, 이건희 회장은 퇴진 선언 2년도 안 돼 경영에 복귀했다. ‘삼성그룹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이건희 회장의 노하우와 지혜를 이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또한 삼성은 이 회장의 차명재산 ‘실명전환 후 헌납’을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 경제개혁연대가 삼성 측의 공시 내용을 토대로 계산한 결과, 이 회장의 실명전환 주식가액과 삼성특검이 밝힌 차명재산 총액이 3000억~6000억 원 차이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물론 삼성은 쇄신안과 별개로 2011년부터 준법감시제도를 운영했다. 별도의 컴플라이언스(준법감시) 조직을 신설, 50여 명의 직원이 운영해왔다. 하지만 삼성 법무실 하부 조직으로 사실상 경영진과 분리되지 않았고, 업무 역시 사실상 일부 사업의 ‘사후 점검’에 국한돼 제한적 역할에 그친다는 지적을 받는다.
# 이재용 부회장의 쇄신안 역시…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열린 ‘박근혜-최서원 국정농단 사건’관련 파기환송심 3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하지만 이 역시 공염불로 그칠 것으로 보인다. 해체된 미래전략실은 1년도 되지 않은 2017년 11월 사업지원TF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업지원TF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각각 설치돼 전자계열사와 금융계열사를 구분해 관장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의 사업지원TF는 지난해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조작 사건에서 증거 인멸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이재용 부회장의 최측근 정현호 사업지원TF 사장이 검찰 소환조사를 받기도 했고, 이 부회장도 수사선상에 올라있다.
결국 삼성이 대대적인 발표만이 아닌 변화하는 모습을 결과로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 문제를 지적해 온 정치권 관계자는 “지금 삼성의 발표에 대해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유는 과거에도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삼성이 준법, 쇄신 방안을 내놨지만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저 재판 판결에 영향을 주기 위한 쇼였는지, 아니면 무노조 경영이나 합병을 통한 경영권 승계 등 문제에 대해 바뀐 태도로 새로운 삼성 경영의 시작점이 되려는 노력인지는 결과물로 보여줘야 한다”고 전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