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한 3사 맡아 키워 그룹 성장 발판으로…2세들 집안싸움 와중 해운은 파산, 중공업은 남의 손으로
공공기관 민영화를 둘러싼 공방이 뜨겁다. 5월 17일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인천국제공항 경영은 정부가 하되 30~40% 정도는 지분을 민간에 팔아야 한다”고 답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대통령실은 “민영화를 검토한 적도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야당은 반발했다. 이재명 민주당 의원은 제1호 법안으로 이른바 ‘민영화 방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노동계는 민영화 저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에 돌입했다. 일요신문이 창간30주년을 맞아 공공부문에서 민영화된 사업들의 궤적을 좇아봤다.[일요신문] 한진그룹은 항공, 해운, 중공업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 공기업을 인수하면서 민영화로 기틀을 마련했다. 1968년 박정희 정부는 민간기업 육성을 통해 시장경제를 유도한다는 목적 아래 민영화를 처음으로 추진했다. 한국기계, 대한통운, 대한해운, 대한조선, 인천중공업, 대한철광, 대한항공, 한국광업제련(1970년), 대한염업(1971년), 상업은행, 한국수산개발(1973년) 등 11개 공기업이 민영화됐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대한해운(한진해운)과 대한조선(현 HJ중공업), 대한항공을 인수했다. 민영화를 발판으로 성장한 한진그룹은 ‘2022년 공시대상기업집단’에서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계열사는 33개, 자산총액은 35조 2380억 원이다.
#부실 공기업 해결사 조중훈 창업주
1962년부터 운영된 공기업 대한항공공사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보유한 비행기는 고작 8대였다. 그나마 DC-9 제트기 한 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수명이 다하거나 임차한 프로펠러기였다. 전체 좌석 수는 400석에 미치지 못했다. 누적 적자로 인해 파산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정부는 항공공사를 맡기고자 재계 유력 인사들에게 인수 의사를 타진했지만, 아무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1969년 3월 ‘대한항공’으로 출범시켰다. 고 조중훈 창업주는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 역시 빚더미에 올라앉은 대한항공을 인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당시 정부의 재정통인 김성곤 의원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항공공사 인수 요청을 받았지만, 정중하게 사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68년 여름 무렵, 청와대로부터 느닷없이 부름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고, 단둘이 남아 독대하게 됐다. 한 나라의 원수인 대통령이 국가의 체면까지 거론하며 그렇게까지 요청하는데 사업가로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대한항공은 수많은 부침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조중훈 창업주가 공중운송 기틀을 닦았다면,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덩치와 내실을 키우며 굴지의 글로벌 항공사를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대한항공은 전 세계 43개국, 120개 도시에 취항하는 글로벌 항공사로 우뚝 솟았다.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9조 168억 원, 1조 4179억 원에 달한다.
1977년 조중훈 창업주는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78년 중동 항로, 1979년 북미서안 항로를 개설하며 글로벌 해운사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87년 한진그룹은 7000억 원 이상의 금융부채 중 50%를 반감하는 조건으로 대한선주를 인수했다. 이듬해엔 대한선주를 흡수합병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대한해운공사를 모태로 한 대한선주는 정부가 1949년 출범시킨 공기업으로 한진해운은 국내 첫 국적 해운사 정통성 계보를 이었다. 1991년 한진해운은 매출 10억 달러와 흑자경영 체제를 이루며 글로벌 해운선사의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국내 1위뿐만 아니라, 글로벌 7위 해운사로 발돋움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자서전을 통해 “대한선주는 1983년 이후 경영 수지 악화로 인해 누적 적자가 7485억 원에 달했고, 파산이라는 벼랑 끝에 서게 됐다. 1986년 10월 대한선주 인수를 권유받았으나 불황 타개를 위해 감량 경영 체제에 돌입해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해운업에 손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완곡히 거절했다”며 “두 번의 거절에도 불구, 세 번째의 인수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인수 배경을 설명했다.
1989년 조중훈 창업주는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한 뒤 ‘한진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해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1937년 일본 자본으로 설립된 조선공사는 1950년 1월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했고, 1968년 민영화됐다. 이후 조선소가 업계 불황으로 인해 영업 적자를 면치 못했고, 결국 1987년 법정관리 절차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신탁은행이 공개경쟁 입찰로 대한조선공사 매각을 추진했으나 동부그룹, 쌍용 등이 입찰을 포기할 정도로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진그룹에 인수된 후 한진중공업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 4대 중공업 회사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자서전에서 “그룹 내 각종 선박 자체 수리를 위해 조선소 설립도 검토했지만, 어려운 위기에 처한 기업을 인수해 되살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특히 대한선주 선박이 10년 이상 된 중고선이 태반이라 조선소 매입이 절실하다고 검토되고 있던 터였다”며 “1960년대 말 정부 방침에 의해 추진됐던 국영 기업의 민영화에 따라 원치도 않았던 대한항공을 맡아 짧은 기간에 이를 정상화시켜 놓은 이래 20여 년 뒤, 나는 결국 정상화에 실패한 ‘해운공사’와 ‘조선공사’까지 내 손으로 재건하게 된 것이다. 마치 부실기업을 맡아 이를 되살리는 전문가가 되다시피 했다”고 밝혔다.
#계속되는 집안싸움
조중훈 창업주는 1990년대부터 2세 승계를 준비해왔으나, 이를 매듭짓지 못하고 2002년 타계한다. 장자승계 원칙이 담긴 유언에 따라, 장남 조양호 회장이 한진그룹 회장직에 올랐고 가장 큰 계열사인 대한항공을 물려받았다. 차남 조남호 회장이 한진중공업을, 삼남인 고 조수호 회장은 한진해운을, 막내 조정호 회장은 메리츠금융그룹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형제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형제의 난’으로 이어지게 됐다.
2005년 조남호·정호 형제가 함께 고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유언장이 조작됐다며 정석기업 주식과 관련한 손해배상을 하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조양호 회장이 정석기업 주식을 차남과 막내에게 돌려주면서 분쟁은 일단락됐지만, 이후 갈등의 골이 깊어진 형제들은 아버지 제사를 한 번도 같이 지낸 적이 없다고 알려졌다.
2006년 고 조양호 회장은 제부인 최은영 씨와 경영권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조수호 회장이 2006년 세상을 떠난 후 부인 최 씨가 한진해운 회장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최 씨는 회장으로서 한진해운을 이끌었으나 2013년 세계 해운업 불황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최 씨가 고 조양호 회장에게 한진해운 경영권을 넘겼다. 조양호 회장이 사재까지 털어서 한진해운을 지원했으나 2017년 파산을 막진 못했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각종 논란에 휩싸였다. 한진중공업은 2011년 경영난을 이유로 정규직·비정규직 3000명을 해고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2001~2010년간 총 4366억 원의 흑자를 냈음에도 직원들을 해고했기 때문이다. 부실경영도 도마 위에 올랐다.
2016년 한진중공업은 유동성 위기에 몰리면서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자산 매각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경영난을 해결하기엔 부족했다. 2019년 자회사 수빅조선소마저 현지 법원에 회생 절차를 신청하면서 완전 자본잠식에 빠지고 말았다. 조남호 회장은 경영 부실 책임을 지고 회장직을 내려놨다. 2021년 4월 동부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컨소시엄이 한진중공업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HJ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꿨다.
3세 경영에서도 ‘남매의 난’이 벌어졌다. 2019년 4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폐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2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동생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에게 “선대 회장의 유훈과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조 전 부사장은 사모펀드인 KCGI, 반도건설 등과 함께 반(反) 조원태 연합을 결성했다. 남매간 경영권 분쟁은 2021년 4월 조원태 회장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 전 부사장은 3년째 고 조양호 회장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조 전 부사장은 2014년 땅콩회항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2018년 물컵 갑질 사태로 사회적 공분을 사며 물러났지만, 2019년 6월 한진칼 전무로 복귀했다. 올해 초 한진 미래성장전략 및 마케팅 총괄 사장으로 승진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