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건은 내 신념 담아낼지 여부, 5년 안에 가닥 잡힐 것…AI 도입 웹툰업계 진통, 이젠 활용법 고민해야 할 시점”
#만화가 사후에도 작품 활동 계속한다면…
만화가 이현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다. 1954년생으로 1979년에 데뷔해 ‘까치 시리즈’와 ‘공포의 외인구단’ 등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1997년에 한국사를 다룬 ‘천국의 신화’가 예기치 못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6년간 연재를 중단한 후부터는 골프만화와 학습만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현재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네이버 웹툰 ‘늑대처럼 홀로’를 연재 중이다. 다만 그는 스스로를 웹툰작가면서도 출판만화를 선호하고 디지털 도구가 아닌 손으로 만화를 그리는 ‘경계인’이라고 규정한다. 이현세 만화가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웹툰 작법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출판만화 시절의 느린 호흡과 연출을 좋아하기 때문에 트렌드를 따라가기 벅차다”라고 말했다.
그런 이현세 만화가가 지난해 10월부터 웹툰프로덕션 재담미디어와 합작해 ‘이현세AI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지난 45년간 창작한 작품 4174권 분량을 AI에 학습시켜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프로젝트다. AI가 데이터를 전부 학습한다면 이현세 만화가의 지난 시절 그림체까지도 자유자재로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다.
특히 이현세 만화가가 가장 흥미를 느낀 지점은 본인의 사후에도 AI가 계속 만화를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는 ‘비전’이다. 이현세 만화가는 “궁극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 이유다. ‘내가 죽지 않고 쭉 살아간다면 미래의 세상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만화를 그리게 될까’라는 생각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그가 1990년대 말에 출간한 ‘황금의 꽃’에 등장하는 ‘레기온’을 연상시킨다. 레기온은 사이버 세상의 무수한 정보들이 조합되면서 생겨난 하나의 지식인격체로 ‘황금의 꽃’은 그 인격체가 인간을 지배하는 이야기다. 이현세 만화가는 “내가 레기온의 일부가 된 것처럼, 어떤 의미론 무섭고 끔찍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죽으면 거기서 끝이 나는 게 순리 아닌가”라면서도 “그렇지만 모험은 즐거운 거니까 어떤 욕을 먹든 한번 저질러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만 ‘이현세AI’는 아직 불완전한 수준이다. 감정표현이나 스토리텔링에도 오류가 적잖은 데다 느닷없이 캐릭터 ‘까치’의 얼굴에 여성의 신체를 붙여놓거나 팔이 세 개가 나오기도 한다. 일차적인 목표는 이현세 만화가가 1993년에 출간한 중단편만화 ‘고교 외인부대’를 올해 12월에 ‘이현세AI’가 현대의 감성과 스타일로 완전히 다시 그려내는 작업이다. 이 만화가는 “완성도가 아주 높으면 대단히 떠들썩할 거고 완성도가 낮으면 굉장히 많은 비판이 날아올 거다. 각오는 돼 있다”고 말했다.
향후 관건은 ‘이현세AI’가 이현세의 주요 작품에 항상 녹아나오던 특유의 ‘반골기질’이나 ‘저항정신’ 등까지 담아낼 수 있을지다. 이현세 만화가한테도 가장 궁금한 지점이다. 이현세 만화가는 “내 신념까지 담아내지 못하면 ‘이현세AI’는 그저 한번의 이벤트로 그칠 뿐 작가인 이현세한테는 별 의미가 없다”며 “5년 정도 안에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정말 인간 작가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게 된다면 인간사회에 여러 가지 면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AI 도입은 피할 수 없는 흐름…“잘 활용할 방법 고민해야”
AI 사용 여부를 놓고 웹툰업계에서는 진통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네이버웹툰에서 AI툴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웹툰이 출시 직후 ‘별점 테러’를 당했다. 네이버웹툰 이용약관에 ‘회원이 네이버웹툰 서비스 내에 게시하는 게시물은 연구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이버 도전 만화에는 ‘AI웹툰 보이콧 만화’가 잇달아 게시됐다. 때맞춰 카카오웹툰은 6월 6일까지 접수한 게릴라 공모전에서 ‘인간의 손으로 인간이 그린’ 작품만 지원을 받겠다는 방침을 밝혀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현세 만화가는 “AI를 학습시키는 데 사용하는 무수한 저작물들의 저작권을 어떻게 인정할지가 향후 화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AI로 인해 웹툰업계 내 경쟁이 더 심화하리라는 우려도 적잖다. 현재 웹툰 작가들 대다수는 회당 평균 70~80컷 분량의 만화를 주1회씩 업로드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까닭에 명절 휴재 여부도 작가들끼리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웹툰 창작에 AI가 도입되면서 창작이 편리해지면 작가들의 휴식권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 회 당 평균 컷수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현세 만화가는 “경쟁이 너무 심한 건 웹툰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플랫폼 내부에서 한번 순위가 구축되면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AI를 사용하게 되면 다들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세 만화가는 특히 스튜디오를 구축한 인기 작가들부터 제일 먼저 AI를 사용할 거라고 보고 있다. 어시스턴트 작가를 다수 거느린 인기작가의 경우 AI까지 활용하면 아예 연재작 개수를 늘려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만화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면 웹툰을 그리는 데 AI가 못 들어오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지만 이미 자본이 움직이면서 시장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 AI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현세 만화가는 플랫폼 차원에서 AI사업을 통해 번 수익을 일정 부분 나눠 적극적으로 만화가들을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만화가는 “AI가 들어오면 혼자서 작업하는 작가들이 더 힘들어질 거다. 이들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플랫폼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며 “일본 작품 ‘귀멸의 칼날’처럼 연재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던 작품이라도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로 히트 치면 다시 치고 올라가기도 한다. 국내 플랫폼들도 넓게 보고 작가들에게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세 만화가는 후배들을 향해서도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사실 일한 시간보다 방황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그리 가치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다”며 “고민이 많겠지만 손을 놓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결국 본인의 손해다. 지금 쓰고 그리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무조건 쓰고 그리고 봐라. 그리고 달리면서 고민했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