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수능 우려에 ‘고등교육법 위반’ 비판도 일어…사교육 영향 갑론을박 속 긍정적 평가도
#“체계적으로 준비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지난 3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수능 시행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고 EBS 연계 교재와 강의로 보완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정 난이도를 갖춘 문항을 출제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수능 킬러문항 배제 정책을 사전에 발표했다는 정부 측이 근거로 드는 대목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교육개혁 일환으로 사교육비 경감 및 공교육 강화를 외쳐왔다. 이러한 기조가 평가원 발표에 반영됐고, 이는 곧 킬러문항 배제 정책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킬러문항 배제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는 의미다.
수험생들 반응은 곱지 않다. 일요신문이 만난 수험생들은 킬러문항 배제 정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전에 이미 발표했다는 정부 측 입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홍보조차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에선 자유롭기 힘들어 보인다.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허 아무개 군은 “지난 대선 때부터 여당과 야당 관계없이 수능 난이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는 정책이 나왔던 것으로 안다”면서도 “이것이 수능 킬러문항 배제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너무 급작스럽게 이뤄진 것 같다”고 말했다. 허 군은 “이번 발표가 나온 다음 정치에 관심 없었던 친구들도 하루 종일 이와 관련된 이야기만 한다”고 전했다.
경남 양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장 아무개 군도 “사교육비를 줄이고 공교육의 질을 높이겠다고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수능에 대한 (킬러문항 배제 정책은) 급작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장 군은 “이전부터 체계적으로 준비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인데 준비도 안 하고 관련된 이야기도 없어 혼란만 준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정부가 고등교육법을 어기고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6월 21일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고등교육법은 교육부 장관이 시험 과목이나 형식 등을 4년 전에 공표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원내대표 말처럼 고등교육법 34조 5항은 수능 등 교육부 장관이 시행하는 시험의 기본 방향과 과목, 평가 방법, 출제형식을 4년 전에 공표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학원가에서는 정부가 관련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지만 수능을 약 150일 앞두고 난이도 조정 정책을 발표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교육평가연구소 평가이사는 “수능 난이도 문제이기 때문에 4년 예고제와 관계가 없을 수 있다”면서도 “이와 같은 전례는 없다. 보통은 3월에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급박하게 하는 경우는 기억에 없다”고 했다. 이만기 평가이사는 1986년부터 교육계에서 종사했다.
남윤곤 메가스터디교육 입시전략연구소 소장은 “이는 법 해석 영역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난이도 조정을 지금까지 해본 적이 별로 없고 올해 처음 있는 일”이라며 “(학원가와 수험생 일각에서는) 소송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사교육에 미칠 영향 두고 평가 엇갈려
정부가 킬러문항 배제 정책의 목표로 내세운 사교육 완화도 달성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전망이 나온다. 킬러문항이 사라지면 사교육을 줄일 것이냐는 질문에 앞서의 허 군은 “하던 대로 할 것 같다. 인터넷 강의를 늘리거나 학원을 더 다니거나 하는 결정은 이번 정부의 발표가 있기 전에도 했을 생각”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남윤곤 소장은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사교육을 받는 것은 본인이 부족한 것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사교육 증감과는 다른 문제”라고 설명했다. 킬러문항 배제 정책이 사교육비 경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취지다.
오히려 사교육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재수 종합학원에 다니는 김 아무개 씨는 “주변 재수생들 말을 들어보면 국어 같은 경우 난이도가 올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들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며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인터넷 강의를 새로 구매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애초에 정부 정책이 불안감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은 것 아닌가 싶다”고 토로했다.
김 씨 말처럼 실제 학원가에선 수능에서 킬러문항이 배제되는 대신 전반적으로 난이도가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반대로 지나치게 문제가 쉬워 변별력이 없는 ‘물수능’이 될 것으로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수능을 불과 150여 일 앞두고 나온 킬러문항 배제 정책이 수험생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긍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교육 강화와 사교육 축소를 주장해 온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소장은 “수능을 5개월 남짓 남긴 시점에서 정책이 나오니까 다소 혼란스럽고 불안한 분위기가 나올 수 있다”면서도 “9월 모의평가가 지나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 소장은 수능 변별력이 무너졌던 사례가 없었고 입시 방안도 확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오히려 킬러문항이 사라지면서 하위권과 중위권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덜어지고 사교육비가 완화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 소장은 “초저출산 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 입시 치르는 학생들을 ‘킬 한다’는 문제를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라며 “이번 정책은 사교육 완화로 가는 초입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