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연봉 1위 등극에 “부담 느끼지 않고 더 열심히 하겠다”
입단식 다음 날 이뤄진 일요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정후는 자신의 소속을 소개하며 조금 쑥스러워했다. 입단식을 치렀음에도 여전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정후’란 타이틀이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 후 7년간 ‘키움 히어로즈 이정후’였던 그가 며칠 만에 구단이, 그것도 메이저리그 명문 팀으로 소속이 바뀐 상황이었다.
12월 15일 오후 1시(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구장인 오라클 파크에서 이정후의 입단식이 진행됐다. ‘6년 총 1억 1300만 달러(약 1484억 원)와 4년 뒤 옵트아웃(구단과 선수 합의로 계약 파기) 조항이 포함’된 선수답게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최대한 성대하게 입단식을 준비했다.
오라클 파크 전광판에 이정후를 환영한다는 메시지와 이정후의 사진을 크게 띄웠고, 샌프란시스코 클럽하우스에서 이뤄진 입단식에는 비시즌이고,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둔 상황에서도 50여 명의 취재진들이 참석해 이정후에게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밥 멜빈 감독은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파한 자이디 사장, 피트 푸틸라 단장과 이정후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 그리고 이정후의 아버지 이종범 코치와 어머니 정연희 씨 등이 참석해 이정후의 입단식을 지켜봤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네요.”
입단식 치르고 하루가 지난 12월 16일 낮 12시에 만난 이정후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터뷰는 이정후가 묵고 있는 호텔 방 안에서 이뤄졌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에서 마련해준 그 방은 오라클 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경을 자랑했다.
이정후는 샌프란시스코 팀의 주황색 셔츠를 입고 기자를 맞이했는데 “이 주황색 티셔츠가 잘 어울리나요?”라고 묻고서는 또다시 환한 미소를 보인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미국에 훈련하러 온 것 같거든요. 한국 돌아가면 다시 고척돔(키움 홈구장)에 나가서 운동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년 샌프란시스코 스프링캠프 때 새로운 팀메이트들을 만나야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이정후에게 입단식에서 영어로 끝까지 인사말을 전한 것과 샌프란스코 모자를 착용하며 “핸섬?”이라고 말한 이유를 물었다.
“기자 분들에게 ‘핸섬’이라고 물은 건 다소 딱딱한 분위기를 재미있게 하고 싶었고, 순간 생각나는 단어가 그것밖에 없어서 그냥 뱉은 거예요. 영어로 인사한 건 제가 키움 있을 때 외국인 선수들이 팀에 합류해서 한국말이 서툴러도 한국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호감이 생겼거든요. 특히 푸이그 선수를 통해서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고 처음 팬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서툰 영어라도 하려고 노력하면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정후는 입단식 이후 자신과 관련된 영상을 찾아봤지만 영어로 인사하는 장면은 ‘스킵’하고 지나갔다고 말한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장면은 못 볼 것 같다”며 민망함을 표현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미국 기자들에게 자신을 “한국에서 온 바람의 손자”라고 표현한 이정후의 당시 마음은 어떠했을까. 한 미국 기자가 “아버지한테 야구를 배웠느냐”라고 묻자 이정후는 “야구를 배운 적은 없다. 대신 인성을 배웠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장면이, 그리고 구단에서 부모님을 대하는 모습들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키움에 있을 때도 대우를 잘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보니 ‘와, 이래서 메이저리그구나’라는 걸 계속 느끼게 되더라고요. 야구장에 선수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어요. 구단 직원 분들과 부서가 정말 많았고, 그들이 저를 위해 여러 가지를 배려하고 신경써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장 컸던 게 지난 10월 샌프란시스코 푸틸라 단장님이 한국 고척돔을 방문하신 거였죠. 제가 키움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경기를 직접 지켜보셨고, 결국 제가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됐잖아요. 이런 스토리가 정말 꿈만 같아요.”
이정후를 통해서 샌프란시스코와의 계약 과정을 상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정후는 지난 12월 4일 MLB 포스팅이 공시되기 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에이전시 보라스코퍼레이션 전용 훈련장(BSTI)에서 개인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보라스코퍼레이션의 한국 담당 이정문 이사와 함께 지내며 계약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첫 오퍼가 온 게 미국 현지 시간으로 금요일인 12월 8일이었다.
“처음 포스팅이 공시된 후 며칠 동안 별다른 소식이 없었어요. 기다리는 입장에선 조금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 오퍼가 하나도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었고요. 요시다 마사타카 선수는 작년 포스팅 공시 후 7시간 만에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계약을 발표했거든요. 그걸 떠올리니 이런저런 생각이 앞섰는데 그럴 때마다 운동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주말 앞두고 금요일에 에이전트인 (이)정문 형이랑 쇼핑을 하러 나갔어요. 그때 정문 형이 스캇 보라스의 전화를 받게 된 거예요.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오퍼를 받았고 그 액수가 1억 달러가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보라스가 마지막으로 자신한테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느냐고 해서 바로 ‘예스’라고 답했습니다.”
금요일에 샌프란시스코의 첫 오퍼를 받은 이정후. 하지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됐는데도 스캇 보라스한테서 연락이 없었다. 숙소와 렌트카 연장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것. 화요일 아침까지도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이정후는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축 처졌다고 말한다.
“그러다 화요일 점심 정도에 스캇 보라스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가 제시한 수정안이 거의 진행됐고, 조금의 시간만 더 주면 계약을 마무리하겠다는 내용이었죠. 그날 오후 운동마치고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스캇 보라스가 전화해선 축하한다고. 계약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이정후는 이번 협상 과정을 통해 스캇 보라스가 왜 메이저리그에서 ‘슈퍼 에이전트’로 불리는지를 절감했다고 말한다. 화요일 저녁 스캇 보라스와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는 이정후. 그 자리에서 이정후는 스캇 보라스한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했는데 스캇 보라스는 이정후의 인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니에요. 내가 고맙죠. 당신이 우리 선수여서 고맙고, 나를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이 계약이 성사된 건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노력, 한국에서 뛴 결과물에 대한 보상입니다. 즉 당신이 해온 커리어를 갖고 일을 했던 것이고, 그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아버지 이종범 코치와 어머니 정연희 씨는 스캇 보라스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정후가 메디컬 테스트를 받은 건 현지 시간으로 12월 14일, 목요일 아침 9시였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LA에 있는 이정후가 수요일 밤에 도착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메디컬 테스트를 받도록 배려했다. 메디컬 테스트를 앞두고선 이정후도 긴장했다. 지난해 카를로스 코레아(미네소타 트윈스)가 샌프란시스코와 13년 계약, 총액 3억 5000만 달러에 입단 합의를 마친 후 메디컬 테스트를 받다가 이상이 발견돼 입단식이 취소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요일 아침 9시에 야구장에서 시작해서 그날 오후 5시에 병원에서 모든 테스트가 끝났어요. 제가 올 시즌 한국에서 왼쪽 발목 신전지대 손상으로 봉합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어 살짝 긴장되긴 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메디컬 테스트가 엄청 꼼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다 체크하더라고요. MRI 검사도 네 군데 정도 찍은 것 같아요. 그런데 결과가 정말 빨리 나왔어요. 담당 의사가 모든 결과를 보고 제게 ‘축하한다’고 말을 해줬을 정도입니다.”
팀 닥터가 메디컬 테스트 후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아직 구단으로부터 정식 통보를 받은 게 아니었다. 이정후는 병원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간 다음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구단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다음 날인 금요일 입단식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화요일 샌프란시스코 구단과 계약을 마무리지었고, 목요일 메디컬 테스트 받고, 금요일 입단식을 치렀으니 3일 만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거예요. 3일 만에 제 소속팀이 바뀌었고, 메이저리그 선수로 입단식을 치른 겁니다. 이런 과정이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이정후는 입단식 직전에 올 시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신임 감독으로 선임된 밥 멜빈 감독과 영상으로 인사를 나눴다고 말한다. 지난 시즌까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감독이었던 멜빈 감독은 이정후에게 “이전까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가 김하성이었는데 이젠 이정후로 바뀌었다”며 “웰컴”이라고 반겨줬다는 후문이다.
“멜빈 감독님이 입단식 날 개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신 걸 굉장히 미안해하셨어요. 그 마음을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나요? 올 시즌까지 (김)하성 형의 감독님이었던 분이 내년부터 제 감독님이 되니까요.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벤치 코치님이 이전 KIA의 맷 윌리엄스 감독님이시잖아요. 정말 흥미로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정후는 어느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연봉 1위 선수로 올라섰다. 그는 이런 설명에 미소를 띠며 “그런 내용에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서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다부진 각오를 내비쳤다.
이정후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등번호 51번을 달고 뛴다. 그가 롤모델로 삼는 이치로의 등번호와 같다. 샌프란시스코는 한국에서 온 ‘바람의 손자’를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예고했다. 오라클파크에 이정후가 어떤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