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자경단’ 조직원 정보 제공…마약 거래 등 다른 영역 수사 성과 진전 기대감
2024년 10월 1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경찰청 국정감사에 원은지 추적단 ‘불꽃’ 대표가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원 대표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취재해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공론화해 ‘n번방’의 갓갓 문형욱, ‘박사방’의 박사 조주빈 등의 검거를 이끌어 낸 추적단불꽃의 ‘단’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후 ‘제2의 n번방’의 엘 검거와 ‘서울대 n번방’ 일당 검거 과정에서도 맹활약했다.
매번 수사의 결정적인 단서를 경찰에 제공한 것은 원 대표였다. ‘서울대 n번방’ 사건에선 원 대표가 자신을 ‘음란물을 좋아하는 30대 남성’으로 속여 핵심 피의자 박 아무개 씨에게 직접 접근했다. 이후 아내의 속옷을 요구하는 박 씨와의 만남을 유도해 경찰 체포를 이끌었다. 이처럼 원 대표가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안 경찰은 ‘텔레그램은 수사 협조가 어렵다’는 말만 반복했다.
국정감사에서 원 대표는 “한 피해자가 2019년에 수사관에게 ‘텔레그램은 수사 협조가 어렵다’ ‘피해물 올라온 것을 직접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연락해 지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5년이 흘렀음에도 수사기관은 같은 말만 한다”면서 “민원 창구에서 피해자분들을 받는 수사관의 전문성, 진심, 의지를 고취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이번 자경단 검거 과정에서 처음으로 추적단 ‘불꽃’ 원 대표가 등장하지 않았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2대 성폭력 전담팀인 3팀이 2023년 12월 수사에 착수해 1년여 만에 총책인 ‘목사’ A 씨(34) 등 조직원 14명을 포함해 모두 54명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번에도 경찰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역시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벌어진 범죄이기 때문이었다. 자경단이 범행에 사용한 텔레그램 채널과 대화방은 모두 453개나 되고, 총책 ‘목사’ A 씨가 직접 운영한 채널과 대화방이 60개나 됐다. 이 과정에서 A 씨는 “텔레그램은 안 걸린다”는 말을 자주했다. 심지어 “헛고생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라며 수사 중인 경찰을 조롱하는 발언도 했다. 그만큼 텔레그램은 범죄자들에게 확실한 안전지대였다.
그런데 2024년 8월 텔레그램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됐다. 러시아 출생인 두로프는 여자친구와 함께 개인 전용기로 아제르바이잔에서 출국해 프랑스로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됐다. 파리 검찰청은 두로프에게 ‘프랑스 정보기관의 감청 관련 정보 전달 거부’, ‘텔레그램 플랫폼에서 진행되는 각종 조직범죄 공모’, ‘사용자의 기밀을 보장하는 암호화 서비스 제공’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이후 텔레그램이 변화했다. 범죄 관련 모니터링 업무를 강화하고 관련 직원도 충원했다. 텔레그렘이 프랑스 정부에 넘긴 정보가 2024년 상반기 10건에 불과했지만 8월에 이뤄진 두로프 체포 여파로 2024년 하반기에 883건으로 급증했다.
한국 경찰은 바로 텔레그램 측에 “성폭력 방조로 텔레그램 CEO가 한국 경찰에 입건될 수 있다”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24년 9월 24일 최초로 텔레그램으로부터 범죄 관련 자료를 회신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자경단 일당 검거가 이뤄졌다. 또한 10월에는 한국 경찰청과 텔레그램이 수사 협조 체제를 구축해 범죄 관련 정보에 대한 공식적인 회신이 시작됐다.
다만 텔레그램이 제공하는 정보는 가입자의 IP 주소와 전화번호뿐이다. 물론 이것도 엄청난 변화지만 여전히 제공 자료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다. 자경단 검거 역시 텔레그램 측의 정보 제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것만으로 검거가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2대 3팀 조승노 경감은 “마약반 출신 수사관들이 큰 활약을 펼쳤다”라며 “폐쇄회로(CC)TV를 열어보는 게 중요한데 이건 강력계 수사관들이 잘한다”고 설명했다. 끈질기게 CCTV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A 씨가 찍힌 모습을 확보하면서 비로소 검거가 이뤄졌다.
자경단 일당 검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경찰청과 텔레그램의 수사 협조 체제 구축으로 범죄 관련 정보에 대한 공식적인 회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성범죄는 물론이고 마약 거래 등 다른 영역에서도 곧 수사 성과가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그만큼 텔레그램은 오랜 기간 각종 범죄의 온상이었다. 서울경찰청은 “텔레그램이 대한민국의 법령과 정책을 준수하며 수사에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밝혀 향후 성착취 등 범죄 척결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