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품 된 청춘이 자존감 찾는 이야기…반복된 굴레 넘어선 청년의 성장 그리고자 했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삶 속에서 ‘프린트 용지’처럼 소모되는 부품으로 여겨지는 청년 미키의 ‘죽고 싶지 않지만 죽어야만 하는 이야기’는 정식 개봉 전 시사회에서 비슷한 세대들의 많은 공감을 얻어내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지언정 부러질 순 없는 청춘들의 모습을 비춘 듯한 미키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연약한 청년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며 많은 공감과 이해의 관람평을 듣고 싶다고 소망했다. 아래는 봉준호 감독과의 ‘미키 17’ 인터뷰 일문일답.

“미키와 비슷한 심정이다(웃음). 극 중에서 미키가 그렇게 여러 번 죽어도 죽을 때마다 무섭고, 싫고, 피하고 싶어하지 않나. 감독 입장에서도 그렇다. 이번 ‘미키 17’은 ‘봉 8’, 봉준호의 여덟 번째 영화인데(웃음), 공개 전엔 매번 두렵고, 무섭고, 걱정도 되면서 신나기도 한 복합적인 마음이 든다.”
―‘미키 17’을 짧게 설명한다면 어떤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
“SF(공상과학) 영화이지만 근본적으론 휴먼 드라마다. 미키라는 청년이 좀 불쌍하면서도 웃기기도 하고, 허술한 구석이 참 많은 친구인데 어떻게 해서든 꾸역꾸역 살아남으려 발버둥친다. 기본적으로는 미키, 또는 미키와 나샤(나오미 애키 분) 커플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커플인 악당 독재자 부부에 대한 질문도 꽤 많았는데 다들 각자의 나라에서 겪고 있는 정치적 스트레스를 투사하는 것 같더라(웃음). ‘이 캐릭터는 아무개를 모델로 한 거 아니에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아마도 보편적이면서도 안 좋은 정치적 리더의 교집합과 공통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작 소설인 ‘미키 7’과의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관람의 재미가 될 것 같다. 어떤 차별화를 뒀나.
“원작은 그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다. 과학적으로도 심도 깊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골수 SF 팬들에겐 아주 매력적이지만 저는 청개구리 기질이라(웃음). 제가 SF 영화를 네 편(‘괴물’, ‘옥자’ 포함) 찍었지만 항상 SF가 아닌 SF 영화를 많이 찍었던 것 같다. 이번에도 우주로 날아가고, 휴먼 프린터란 첨단 기술도 나오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지질한 실수를 반복한다. 제가 초점을 맞춘 것도 그것이다.”
―‘미키 17’ 속 미키의 모습이 원작과 다소 다르게 그려진 것도 그런 이유에선가.
“원작의 미키는 역사학자로 나오지만 저는 훨씬 좀 더 찐따 같고 불쌍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손해를 많이 보게 생긴’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다. 미키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웃음). 이렇게 늘 손해보고, 불쌍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청년으로 미키를 만들고 싶었다. 이처럼 순수 SF의 더욱 철학적이고 깊은 과학 이야기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미키란 친구의 입장이 돼서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에 초점을 맞췄다. 저희들끼린 ‘발 냄새 나는 SF 영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홍보팀에서 표현이 심하다고 ‘인간 냄새’라고 바꾸자 하더라(웃음).”

“저는 그러면 안 되나요(웃음)? 어떤 기자님은 그러시더라. ‘진짜 원했던 건 그게 아니죠? 진짜 엔딩은 바로 그 직전에 나온 장면이죠?’라고(웃음). 엔딩과 그 직전의 신은 사실 정말 엄청나게 공들여서 찍었다. 관객들에게도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길 바랐는데, 동시에 미키가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까지 제가 찍은 영화를 곱씹어 보니 제가 만든 캐릭터들에게 굉장히 가혹했었단 생각이 들더라. 한 번쯤은 결말에서만이라도 덜 가혹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미키가 겪는 일이 하도 가혹하니까 이런 말도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얼음행성 개척 부대의 여성 요원인 카이가 자신을 ‘자궁’ 취급하는 독재자 마셜에게 항의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그런 사건이 있었다. 관계부처에서 ‘전국 가임기 여성 분포도’라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더라. 무슨 천연기념물 분포도도 아니고, 그런 발상 자체가 너무 황당하지 않나. 이런 어이없는 관점은 마셜도 가지고 있다. 개척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번식하라!’라고 외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카이는 굉장히 실용적인 인물이지만 맞서야 할 땐 맞서는 사람이다. 현대적인 면모를 지닌 똑 부러진 여성이면서도 의외로 권력과 힘에 쉽게 순응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한쪽으로만은 치우치지 않는다. 배우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가 그 역할을 하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어벤져스’의 헐크로 익숙한 마크 러팔로가 독재자 마셜을 맡아 보여준 다채롭고 역겨운 연기가 놀라웠다. 첫 악역 도전이라는데 캐스팅 과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독재자 캐릭터를 써 놓고 여러 생각을 해보다가 마크 러팔로가 딱 떠올랐는데 너무 재미있더라(웃음). 원래 본인은 시민단체 활동도 열심히 해 사회 운동가 측면도 가지고 있다 보니 본인이 가장 증오하는 캐릭터를 자기가 연기해야 하는 상황인 거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당황해 하더니 저와의 온라인 미팅에서 ‘봉, 와이 미(Why me ·왜 나를 이런 역에 캐스팅 했나), 와이’라며 실제로 슬퍼했다(웃음). ‘나한테 이런 면이 있어?’라면서. 그래서 ‘아니, 프로 배우잖아요. 이런 역을 하자는 거죠’라고 말했더니 ‘맞아, 난 배우야!’ 그러더라. 너무 귀여웠다(웃음). 막상 촬영하니 본인도 재미있어 했던 것 같다.”
―마셜 캐릭터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상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외신 기자 분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나이가 많으신 한 이탈리아 기자 분이 ‘마셜은 무솔리니를 모델로 한 거지? 군복을 입은 것과 턱을 내미는 버릇, 전형적인 파시스트 모습이 딱 무솔리니다’라고 그러시더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것 같다고 했다(웃음). 아마 이 분처럼 각 나라의 상황마다 (독재자들을) 투사시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랑 마크 러팔로는 마셜을 만들면서 우리가 이제까지 겪었던 여러 정치적인 악몽을 나눴었다. 독재라는 게 항상 블랙 코미디가 따라 붙지 않나. 무섭고 짜증나지만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있다. 그런 걸 마셜에게 복합적으로 녹여 담고 싶었다.”

“사실 저는 정통 멜로 영화도 찍어보고 싶다. 뮤지컬 장르 빼고는 다 해보고 싶다(웃음). 사실 미키와 나샤의 로맨스는 원작 소설에도 있다. 저도 보고 약간 눈물 짓게 만든 챕터로 나샤가 미키를 지켜주는 모습이 정말 눈물겨웠다. 이 장면만큼은 그대로 살려 와서 좋은 남녀 배우의 조합으로 잘 찍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나샤는 단순히 미키라는 남자주인공 옆의 애인으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미키가 나샤에게 보호를 받고 있고, 나샤는 영화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식을 180도 전환 시켜준다. 그런 통찰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나샤다. 단순히 로맨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독재자와도 강력한 대결을 펼칠 수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미키를 지켜주는 것이다. 나샤가 있었기에 제가 원하는 결말대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얼음행성의 원주민 크리처인 ‘크리퍼’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실 것 같다.
“정말 얘기할 게 많다(웃음). 크리퍼의 디자인은 크루아상 빵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빵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직일 것 같이 생겼거든(웃음). 영화에서 크리퍼 디자인은 총 세 가지가 나온다. 마마 크리퍼, 주니어 크리퍼 그리고 베이비 크리퍼다. 설원을 굴러다니는 주니어의 액션은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지축을 뒤흔들며 질주하는 버팔로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그들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사운드를 위해 사운드 팀에 특별히 부탁하기도 했었다. 또 크리퍼들의 집단 움직임은 알래스카에 사는 순록 무리를 참고했다. 가장 연약한 개체를 중심에 두고 무리가 원형을 그리며 둘러싸는 행동을 하는데, 그런 움직임 중에 ‘야바위’를 생각해 내 어느 무리 안에 마마 크리퍼가 있는지 모르도록 한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CG팀한테 처음 설명할 땐 좀 애먹었다(웃음).”
― 제작비가 매우 많이 든 영화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개봉 시기가 계속 연기된 부분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말이 오갔는데.
“처음 설정된 예산은 1억 2000만 달러였는데, 제가 프로듀서 분들께 물어보니 딱 1억 1800만 달러를 썼더라. 예산 안에서 잘 끝낸 거다. 작은 영화는 결코 아니지만 3억 달러까지도 제작비가 치솟는 텐트폴 영화도 아닌 셈이다. 그들도 제가 어떤 감독인지 뻔히 안다.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다 해서 쟤가 개과천선하겠느냐? 원래 이상한 영화 많이 찍는다’ 이렇게 알고 있을 거다. ‘설국열차’ 때 이미 저 녀석 쇠고집은 아무도 못 꺾는단 소문이 다 났거든(웃음). 계약 때 제게 최종 편집권을 주는 ‘디렉터스 파이널 컷’이란 조항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사인했다. 일각에선 편집 관련 갈등으로 개봉이 늦은 게 아니냐고 하시는데 사실은 배우 조합 파업 때문에 6~7개월 정도 늦어졌던 거다.”
―‘미키 17’을 통해 봉준호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
“마셜은 미키에게 경멸과 혐오를 퍼부으면서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다. ‘얘는 그냥 프린트된 물건이다’라고 말하며 출력만 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미키도 답답하리만치 착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물들어 자존감마저 잃어버렸다. 그런 미키가 결국 이 모든 굴레를 딛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원작은 ‘미키 7’이지만, 일부러 17과 18이라는 숫자를 선택했다. 17에서 18이 되는 것에 미키가 어른이 되고 성숙해지는 것을 담아낸 것이다. 17에서 18로, 그리고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미키 반스’가 되는, 한 청년이 자아를 찾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