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부동산 투자사기 휘말려 재산 탕진…“남편 빛나게 해주려고 했을 뿐” 두둔

실제 송대관은 김수찬을 참 좋아했다. 고인은 2024년 11월 신곡 ‘지갑이 형님’ 발표를 앞두고 필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숱한 후배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새롭게 스타로 떠오른 것에 대해 고인은 “후배들이 아주 왕성해야 우리 트롯의 밑뿌리가 이제 튼튼해지는 거니까”라면서 “(김)수찬이가 내 흉내까지 잘 내니까, 너무 잘 내더라고요”라고 칭찬했다.

왜 ‘지갑이 형님’이었을까. 그는 “아∼ 뭐 재밌는 노래예요”라면서 “가진 자들이 지갑을 안 열잖아요, 꽉꽉 잠그고. 그 노래의 제목이 ‘지갑이 형님’인데, ‘팍팍 열어라. 지갑이 형님이여’라고 비유법을 썼어요. 재밌어요. 전체를 들어보셔야 해요”라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송대관은 수많은 후배들에게 ‘지갑이 형님’이었다. 어려운 후배들을 거둬 먹이며 챙겼다. 미국 생활 도중 태진아를 도왔고, 이를 잊지 않는 태진아가 말년 송대관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 병원비를 대신 내줬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송대관은 2013년 아내가 부동산 투자사기 사건에 휘말리며 재산을 탕진한 후 월세방을 전전했다. 더 이상 그의 지갑은 열릴 수 없었다. 그리고 송대관처럼 지갑을 턱턱 여는 선배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지갑이 형님’은 이런 세태가 못내 아쉬웠던 송대관의 자조 섞인 유작이 됐다.
가장 흔한 노래 소재는 사랑이다. 남녀상열지사를 빼면 소재를 찾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송대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노래에는 삶이 녹아 있다. ‘해뜰날’로는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이라고, ‘네 박자’로는 “한 구절 한 고비 꺾어 넘을 때 우리의 사연은 가고 / 울고 보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짝”라며 인생을 달관했다. 그래서 ‘해뜰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 좋아했다. ‘하면된다’, ‘잘 살아보세’가 사회 구호이던 때, ‘해뜰날’은 희망에 차 새벽에 눈을 뜨는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자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송대관의 노래는 그가 나이 먹을수록 더 깊게 익어갔다. 고인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완숙해졌다고”라면서 “노래는 그냥 뭐 말하자면 인생을 진하게 표현한 거거든요. 이제 완전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나? 세월을 보냈지요. ‘네 박자’도 그렇고 갑자기 뭐 이 세월 보니까 ‘8박자’가 된 것 같아”라고 말했다.

항간에는 아내를 탓하는 이들도 있다. 부동산 사기 사건에 휘말리며 송대관이 힘들어했으며, 채무를 갚기 위해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도 고된 스케줄을 소화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송대관은 아내를 원망한 적이 없다. 그는 한 방송에서 “아내는 죄가 없다”면서 “투자해서 돈 좀 벌면 남편을 빛나게 해주려고 꿈을 크게 가졌는데 그게 안 된 것”이라고 감쌌다.
고인과 마지막 나눈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대법원까지 간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이 나왔지만, 여전히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송대관은 가장 사랑하던 무대에 서는 것조차 두렵다고 했다. 하지만 송대관은 그때 역시 누구도 책망하지 않았다. “이 곡을 만들고, 못 가본 여행도 좀 하고…. 뭐라고 그럴까, 정리 좀 했어요”라면서 “마음의 정리도 좀 하고, 내 마음의 치유도 좀 하고 뭐 그렇게 잘 보냈습니다”라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가수의 인생은 그가 발표한 노래를 따라간다고 한다.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로 데뷔했으나 오랜 무명 생활을 한 그는 1975년 ‘해뜰날’로 스타덤에 오른 후에는 정말 인정 많은 아저씨처럼 주변을 살폈다. 이후에도 ‘정 때문에’, ‘네 박자’,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고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롯 4대 천왕’이라 불렸다. 그랬던 그는 지난 2월 7일, 천국행 ‘차표 한 장’을 끊고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